딸은 아빠를 많이 닮는다고 했던가? 나는 유독 아빠를 많이 닮았다. 어디를 가도 단박에 아빠와 딸이라고 알아본다. 짙은 쌍꺼풀과 코의 생김새, 식성과 취향도 많이 닮았다. 엄마는 가끔 나에게서 아빠를 투영했다. 내가 속을 썩이면 이런 것까지 아빠와 닮았다고 얘기하곤 했다. 본인을 많이 닮아서였을까? 우리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오빠보다 나를 각별히 챙겼다.
딸바보 아빠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오라고 하셨다. 도서관에서 공부가 늦어지면 친구들과 먹을 피자를 사다주시기도 했다. 20대 초반 몇 개월간 호주 이모네에 가기로 했을 때, 가장 큰 난관은 아빠였다. 이모의 설득으로 겨우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한동안 못 보는 게 서운했던지 떠나는 날, 결국 내 얼굴을 보지 않으셨다.
딸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던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26살 결혼을 하겠다고 남자 친구를 데리고 간 것이다. 걱정과는 달리 웃으며 허락하셨지만 이른 저녁부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셨다. 꽃다운 27살, 봄. 결혼식 전 날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아빠는 환히 웃고 있었지만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셨다. 그날도 아빠는 이른 저녁부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셨다.
엄마가 투병 중이셨을 때도 아빠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기셨다. 쌍둥이를 출산한 딸이 힘들까 봐서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본인보다 단란한 가정을 꾸린 딸을 늘 걱정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딸바보 아빠는 마흔 넘은 딸에게 '사랑한다 우리 딸'이라고 말씀한다.
며칠 전, 아빠 생신을 맞아 가족끼리 조촐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문득 아빠 나이가 벌써 일흔이 다 되어감을 깨달았다. 나에게 아빠는 꽤 오랫동안 60대 초반이었다. 아이들의 나이가 더해가는 것에 신경 쓰느라 아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제야 아빠 얼굴과 손에 짙어진 주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이번 주말 와이 할아버지가 오신다는 얘기를 전해줬다.(우리 아이들에게 외할아버지의 애칭은 Why할아버지이다.) 딸아이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직접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파티시에가 꿈인 9살 아이의 호기로운 도전이었다. 와이 할아버지가 오기로 한 날 아침. 집에 있는 재료들을 모조리 꺼내어 생크림 딸기 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작은 손으로 달걀을 깨어 거품을 내고, 딸기를 씻고 자르고. 꽤 컸다고 제법 손이 야무졌다.
다 같이 식사를 하고 깜짝 선물이 있다며 아이가 만든 케이크를 꺼내놨다. 딸의 딸이 처음 만든 케이크를 보고는 아빠의 얼굴에 웃음이 퍼져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이라며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티시에가 꿈이라는 아이의 말에 아빠는 '네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 그 덕에 할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가보겠구나'라고 신나 하신다.
할아버지와 재잘거리는 딸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우리 아빠를 행복하게 만든 딸의 모습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딸바보 아빠는 이제 완벽히 딸의 딸 바보까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