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혼돈만이 있을 뿐

장자와 만나는 장자 6

by 기픈옹달

<응제왕>의 마지막에는 흥미로운 우화가 실려있다. 매우 짧은 이 우화는 적잖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우화 전문을 아래 옮긴다.


남해의 신은 숙儵이고, 북해의 신은 홀忽이고, 중앙의 신은 혼돈渾沌이다. 숙과 홀은 수시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 어울려 놀았는데,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을 의논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지. 그런데 이 혼돈에게만 그런 것이 없으니, 그에게 구멍을 뚫어 주기로 하세."

그들은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혼돈은 7일 만에 죽어버렸다.

<응제왕> 김갑수 역


혼돈이 죽은 이야기. 과연 이 우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선 이야기가 '남해'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장자> 내편의 첫 시작 <소요유>는 아득한 북쪽 바다 아래에서 튀어나온 곤이 붕이 되어 아득한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 바다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끝맺는다. 남해의 숙과, 북해의 홀, 그리고 중앙의 혼돈을 주인공을 삼아.


혼돈은 이것저것이 마구 뒤섞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야기에서는 혼돈에게 일곱 개의 구멍이 없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구 뒤섞여 있기 때문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이 어리둥절한 상태가 혼돈 아닐까.


혼돈은 앞에서 호자가 계함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 사물이 생겨나기 이전,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생겨나기 이전, 어떤 사건이나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의 마구 뒤섞인 상태가 혼돈이다.


장자는 이 우화를 통해 혼돈스런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도리어 그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는 순간, 구멍을 뚫어주어 보고 듣고 말하게 해 준다면 혼돈은 죽을 뿐이다. 숙과 홀은 혼돈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혼돈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쉽게 말하고 단정하지 말라는 의미일 테다. 자칫하면 그 대상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


숙과 홀이 말하는 일곱 구멍은 머리에 있는 감각기관을 가리킨다. 이 구멍을 통해 보고, 듣고, 말하고, 숨 쉰다. 한편 이 일곱 구멍은 내편 일곱 편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자> 내편 일곱 편을 읽으며 도에 대해 하나씩 깨우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깨우침은 이 세계의 본모습, 혼돈을 지워버리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단편적인 지식을 얻어 무엇인가를 체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닐까.


실제로 숙과 홀은 '재빨리', '갑자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문득, 잠깐 깨우친 것이 있다. 아리송한 순간 무엇인가 살짝 실마리를 발견한 순간. 이 순간의 깨우침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혼란스러운 세상을 분석하려 한다. 그러나 내편 일곱 편을 읽으며, 일곱 고래를 넘으며 깨우쳤던 깨우침이 한순간에 달아날 수도 있다.


그래서 훗날 장자의 이런 부분을 계승한 선불교는 끊임없이 고정된 지식을 경계한다. 어느 특정한 찰나의 지식에 머물지 말 것, 그것 조차 한 때의 어느 순간의 방편임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응제왕>도 마찬가지이다.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는데, 네 가지를 물었지만 네 가지 다 몰랐다. 그러자 설결은 펄쩍펄쩍 뛰면서 크게 기뻐하고 그 사실을 포의자에게 알렸다.

<응제왕>, 김갑수 역


사실 이 둘의 대화는 <제물론>에서 먼저 나왔다. 설결의 질문에 대해 왕예는 한결같이 대답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장자가 바라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멈추지 말 것. 단순한 대답보다 질문을 소중히 할 것. 끊임없이 회의하고 되물을 것.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장자>는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은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다. 질문이 문득 답을 찾아내긴 하지만 그 답을 다시 곧 버려야만 한다. 다시 다른 질문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붙잡아 한 걸음씩 나아갈 것. 이것의 장자의 방식이다.


이진경은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우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우화는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질문을 몰아치는 그런 것이다. 의문을 그치지 않게 만드는 그것, 그것을 '절대적 우화'라 부른다.


"우화란 흔한 가르침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주는 것이어야 하고, 명확한 것을 의문에 부치고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와 질문을 던지는 것이어야해. 철학과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해."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 이진경, 182쪽


후대 장자의 이런 부분을 참고한 선불교는 고정된 답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른바 화두話頭란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생각거리를 말한다. 이것을 붙잡고 의문의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깨우침의 길이다.


한편 이들은 이른바 선문답을 통해 고정된 지식의 틀을 깨뜨리곤 했다. 선문답은 파괴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기존의 지식과 통념을 깨뜨리고 전혀 다른 생각의 방식을 요구한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더 큰 혼돈에 빠져드는 방식이라고 할까.


혼돈은 답답하고 괴롭다. 그런데도 다시 혼돈을 마주해야 한다니! 그러나 질문을 가지고 혼돈을 마주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너는 날개를 가지고 날아간다는 말은 들어보았겠지만 날개 없이 날아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을 테다. 마찬가지로 앎으로 안다는 말은 들어보았겠지만 앎 없이 안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테다.

<인간세>


거듭 강조하지만 장자는 지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장자는 무지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도 무엇인가를 깨우칠 수 있다. 다만 전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뿐이다.


"선생님은 지금 절대적 우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우화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언제 들을 수 있습니까?"

"하늘이 땅에 내려앉을 때다."

"하늘은 언제 땅에 내려앉습니까?"

"네가 그 절대적 우화를 들을 때 내려 앉는다."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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