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의 삼시 세끼

장자로 만나는 장자 5

by 기픈옹달

<장자> 내편의 마지막 <응제왕>에는 흥미로운 우화가 실려 있다. 우선 열자의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등장인물은 크게 셋이다. 열자와 열자의 스승 호자, 그리고 정나라의 영험한 무당 계함.


이야기는 이렇다. 정나라 무당 계함은 어찌나 영험한지 사람의 수명과 운명을 정확하게 알아맞추었다 한다. 어찌나 신통한지 정나라 사람은 계함을 보면 모두 도망치기 바빴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열자는 이 계함을 보고 돌아와 스승 호자 앞에서 계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선생님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라며. 이 말을 들은 호자는 어땠을까? 결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면전에서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제자라니.


호자는 열자에게 아직 깨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며 그 신통한 계함을 한번 불러오라 말한다. 호자와 계함의 첫 만남, 계함은 호자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마지 젖은 재처럼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재는 불이 타고 남은 흔적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처럼 재에는 언제든 다시 불씨를 일으킬 가능성이 담겨있다. 그러나 물에 젖은 재는 어떨까. 도저히 되살릴 수 없는 상태인 셈.


이 말은 들은 열자는 펑펑 울며 호자에게 소식을 전해준다. 선생님은 이제 얼마 살지 못한다고. 이때 호자는 영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계함에게 땅의 모양을 보여주었단다. 대관절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세한 해석은 접어두자. 다만 호자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주목하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식의. 호자는 다시 계함을 불러 오라 말한다.


두 번째 만남. 호자를 본 계함이 우쭐대며 말한다. 자신 때문에 선생의 병이 나았다고. 막혔던 부분이 트여 비로소 살 수 있게 되었단다. 이번에도 열자는 기쁜 소식을 호자에게 전해준다. 이어지는 호자의 대답. 이번에 나는 하늘의 모양을 보여주었다. 호자는 모두 자신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호자는 곧 죽을 사람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생기 넘치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능력을 가졌다. 세 번째 만남은 어떨까.


세 번째 만남에서 호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호자의 모습이 일정하지 않다는 거다. 이랬다 저랬다 하며 도무지 상태를 읽을 수 없으니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어 보자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호자의 말. 나는 크게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변화무쌍한 호자. 더 놀라운 것은 호자에게 총 9개의 모습이 있단다. 그 가운데 셋만 보여준 것이니 아직도 여섯이 남았다. 계함은 나머지 모습도 읽어낼 수 있을까.


네 번째 만남에서 계함은 호자를 보자마자 도망친다. 호자는 열자를 시켜 계함을 추적하지만 결국 잡지 못한다. 계함을 좇아 내달렸지만 결국 계함을 놓친 열자에게 호자는 이번엔 근원에서 아직 나오기 이전을 보여 주었다 말한다. 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비움 조차도 있기 이전의 어떤 기묘한 상태가 아닐까. 이를 보고 계함을 깜짝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결국 계함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계함은 세상만사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상징한다. 모든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명료한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 그러나 그도 호자의 변화를 다 읽지는 못했다. 도道란 그렇게 천변만화하며 하나의 무엇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일 테다.


그러나 이 우화는 단지 이런 내용을 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한 열자의 이야기가 남았다.


그 뒤 열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와 3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고, 사람을 대접하듯 돼지에게 밥을 먹였다. 세상일에 대하여 특별히 마음 기울이는 일도 애정을 갖는 일도 없었고, 과거에 갈고닦았던 모든 것들을 소박한 본래 상태로 되돌려놓고는 우두커니 홀로 제 몸을 세우고 있었다. 세상사가 혼란스럽게 돌아가도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지키며 한결같이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응제왕> 김갑수 역


열자는 호자와 계함 사이에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 인물이다. 그는 기존 지식의 편협함을 깨닫고 도의 무한함을 깨우친다. 그런 그의 이후 삶은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다. 흔히 장자가 세상을 떠나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신선과도 같이 세속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 거라고.


그러나 열자가 보여주는 삶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이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손수 밥을 지어 아내를 먹이며 사람처럼 돼지를 길렀다는 이야기이다. 밥을 지어 식구를 먹이는 일, 그리고 또 다른 존재를 챙기는 일. 열자의 삶은 소박하고 자질구레하다. 전혀 대단할 것이 없는 삶이다.


대관절 장자는 무슨 이유에서 내편 거의 마지막에 이런 평범한 삶을 이야기하는 걸까? 이는 장자가 추구하는 삶이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이전과 똑같은 일상이 아니라 더 소박하고 충실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장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삶의 모습일 테다.


개인적으로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다는 이 표현이 꽤 인상적이다. 전통사회 속에서 밥을 짓고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여성의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장자는 제 손으로 밥을 하고, 남을 먹이는 삶을 이야기한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끼니를 챙기는 데는 부단한 노동이 필요하다. 세끼를 챙기는 것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지만 매시간 꾸준히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별로 티 나지 않는 일상의 그저 그런 일일 뿐.


그러나 이 노동, 밥을 지어 식사를 마련하는 노동이 중단되면 일상은 쉽게 무너진다. 식구食口란 이 부단한 노동으로 구성된 생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게다가 열자는 돼지를 먹이기도 했단다. 그의 일상은 얼마나 분주할 것인가. 그러나 또 크게 대단할 것 없이 소박할 테다.


장자의 시대로부터 수천 년이 지났다. 삶의 형태도 그만큼 달라졌다. 새로운 기술의 발명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활동도 있고, 반대로 사리진 활동도 있다. 그러나 밥을 지어먹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이 일상의 노동은 권력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누가 차리고 누가 먹는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식탁은 위계 없는 식탁, 나눔과 초대가 있는 식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느 철학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사유를 강요하지 않는다.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일찍이 맹자는 마음을 쓰는 사람, 즉 지식으로 세상이 이바지하는 선비 계층과 몸을 쓰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몸을 쓰는 사람이 마음을 쓰는 사람을 먹여야 한다 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이야기에 의문을 붙일 것이다. 어째서 깨우침을 주는 자, 지식인은 늘 받아먹기만 하는가? 스스로 제 밥상을 챙겨 먹고 또 남을 위해 식사를 차리면 어떨까.


소박함과 겸손은 마음 상태에 달려있지 않다. 도리어 일상의 그런 노동을 감수할 것인가 하는 데 달려있다. 받아먹기만 하는 삶에서 어떻게 소박함과 겸손이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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