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로 만나는 장자 4
<장자>의 외편과 잡편을 정리한, 장자의 후예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힘들다. 다만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는 있다. 그 가운데는 내편에서 제기되었던 장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외편 <산목山木>의 내용이 그렇다. 조금 길지만 그 내용을 옮겨보자.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데도 나무를 베러 온 사람은 그 곁에 멈추어 서 있을 뿐 배려고 하지 않았다. 장자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쓸모가 없어요."
장자가 제자를 보고 말했다.
"이 나무는 재목이 못 되기 대문에 타고난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거야."
장자가 산을 내려가 옛 친구 집에 머물렀다. 친구는 반가워하면서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아 삶으라고 말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물었다.
"한 마리는 잘 울고 다른 한 마리는 울지 못합니다. 어느 것을 잡을까요?"
주인이 말했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장자: 산목> 김갑수 역
장자를 주인공으로 두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앞의 이야기는 분명 <인간세>의 장석 이야기를 참고한 것일 테다. 쓸모 없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는 나무, 그래서 천수를 누리는 나무는 내편에서 익숙한 주제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의 예가 튀어나왔다. 장자가 한 친구의 집에 묵었는데, 친구가 거위를 잡아 대접하려 했다. 어떤 거위를 잡을까. 잘 울어 쓸모 있는 거위를 잡아야 할까. 아니면 못 울어 쓸모 없는 거위를 잡아야 할까. 이번에는 쓸모 없는 거위를 잡는다.
한쪽에서는 쓸모 없어서 화를 피했고, 다른 쪽에서는 쓸모 있어서 화를 피했다. 쓸모 있음이 화를 불러왔다면 쓸모 없음이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산목>편을 보면 장자의 제자가 이 주제를 묻는다. 이에 대한 장자의 대답을 살펴보자.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재목과 재목이 못되는 그 중간에 서야 할까? 재목과 재목이 못 되는 중간은 그럴 듯하면서도 실은 아니야. 그렇게 해서는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만약 도道와 덕德을 타고 자유롭게 노닌다면 그렇지가 않지. 명성도 없고 비난도 없으며, 한 번은 용으로 변했다가 한 번은 뱀으로 변하는 등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면서 어떤 한 가지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준칙으로 삼는다. 만물의 뿌리에서 자유롭게 노닐면서 사물을 그저 사물로 대할 뿐 사물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이 어떻게 나를 속박할 수 있겠느냐? …(중략)… 그대들은 기억하거라. 속박이 없는 삶은 오직 도와 덕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문제가 바뀌었다. <인간세>의 문제가 어떻게 화를 피하는가 였다면 <산목>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변화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다.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 즉 사물을 사물로 대하고 사물에게 사물로 부림 당하지 않음이 <산목>에서 지향하는 목표이다. 도와 덕을 통해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도道야 말로 이런 선택에서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길일 테다.
쓸모 없음의 추구, <산목>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구차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모두 벗어나면 어떨까. 우리를 얽어매는 여러 장애를 걷어내고 절대적인 자유에 노닐자.
그러나 <인간세>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허망한 말이다. 장자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책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둘러싼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인간세>에서는 사회적 책무나 관계의 어려움을, <덕충부>에서는 사회적 폭력에 휘말리는 삶을, <대종사>에서는 병듦과 늙음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도를 만병통치약처럼 그렇게 사용하면 될 텐데 뭣하러 그렇게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장자>를 읽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도의 힘을 빌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있다면 또 하나는 일상의 구차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땅의 별 볼 일 없는 존재에 주목하는 길이다. 어느 것이 맞는 길인지, <장자>의 적합한 독해인지는 알 수 없다. 독자의 몫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책임한 소리일까.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관점에서 <장자>를 읽는 편이다. 우선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비판 철학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철학이란 현실에 대한 낯선 감각을 심어주는 학문이다. 똑같은 것을 낯설에 보게 만들고, 또한 현실의 두터운 장벽에 감추어진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이 안락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철학이란 학문은 필요하지 않을 테다. 철학은 즐기기에 너무 골치가 아프니 말이다.
종종 동양철학은 삶을 위로하고 긍정하는 식으로 소비되곤 한다. 물론 그런 점을 모두 비판할 수는 없을 테다. 고통만 가득 찬 삶을 살 수는 없으니까. 부정만으로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 쉬운 위로와 긍정은 삶의 현재적 문제를 가리기 십상이다. 장자의 말이 너무 쉽게 수용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아닐까.
여기서 '쉽다'는 것이 단순히 어렵고 쉬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짚어두자. 일상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술술 잘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기존의 사고에 균열을 내거나 의문을 던지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아무런 갈등도 고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앞서 이야기한 방황이란 늘 어느 정도의 고달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발은 무겁고 몸은 지친다. 때로는 매서운 바람이 몸을 휘감기도 하고,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할 테다.
한편 개인적으로 방대한 분량의 <장자>를 읽는데, 내편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내편은 장자의 말일 것이라고 입 모아 이야기하는 부분이 아닌가. 또한 일부를 절취하여 해석하는 것이 더 용이한 방법이기도 하다. 33편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게다가 장자 본인의 말이 아닌 이것저것 뒤섞인 텍스트 전체를 통괄하는 흐름을 찾아낸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따라서 내편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장자>를 독해하고자 하는 것이 기본 출발점이다. 내편에서 장자는 자유와 초월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 삶의 고됨을, 권력의 매서움을, 생사에 내던져진 인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장자는 현실을 비스듬히 지나치는 새로운 길들을 소개한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장자 읽기의 하나의 방법 가운데 하나일 테다. 현실에 잡히지 않는 저 세상의 이야기도 하니고, 현실에 묶인 이 세상의 이야기도 아닌 길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장자 읽기는 그렇게 현실에 대한 비판과 긍정을 오가며 진행돼야 할 테다.
비판철학으로 장자 읽기. 이는 일상으로 장자의 이야기를 끌어내리며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마주하게 만들 때 가능한 일이다. 똑같이 삼시 세끼를 챙겨 먹고 이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장자를 읽을 필요가 여기에 있다.
* 고덕평생학습관 강의 : 장자를 만나러 가는 길(5강)의 강의안 초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