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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8. 2021

겸양,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몸가짐

부국강병일통천하5

범저는 이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불안감도 함께 늘었다. 범수가 이전에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관직을 내어준 정안평과 왕계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본디 진나라에서는 소개받은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면 소개해준 사람도 함께 벌을 받아야 했다. 범저도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 소양왕은 이들의 과오를 덮고 범저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려 했으나 범저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높이 올라간 만큼 그 몰락도 클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근심도 클 수밖에.


이런 범저의 상황을 알고 연나라에서 채택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범저의 지위를 빼앗을 수 호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은 어찌 그리 보는 눈이 더디십니까? 대체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차례대로 할 일을 다하면 물러갑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신체가 건강하고 팔다리가 성하고 눈과 귀가 밝고 마음이 지혜로운 것이 선비의 바람 아니겠습니까?"

<범수채택열전> 


채택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사람이란 제 몸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하는 법. 이를 위해서는 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한데, 범저는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를 드는 것이 진의 상군, 초의 오기, 월의 대부 종이다. 이 셋은 모두 저마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최후를 보면 결코 좋지 않았다. 모두 그 자리 때문에 화를 입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채택은 이를 근거로 새로운 삶의 태도를 제안한다. 


"몸과 이름이 모두 온전한 것이 가장 훌륭하며, 이름은 남의 모방이 될 만하지만 자신은 죽는 것이 그다음이고, 이름은 욕되어도 몸만은 온전한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몸과 명성을 모두 이루는 것이 최선이다. 범저는 이미 높은 명성을 얻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보전하는 것이 아닐까? 채택은 앞서 언급한 상군, 오기, 대부 종의 길을 따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공을 세우고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을 이루었다면 이제 물러설 줄을 알아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옛말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왕성해지면 쇠약해지는 것이 천지의 영원한 이치입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 굽히고 펴는 것이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은 성인의 영원한 도리입니다.

…(중략)… 이 네 사람(상군, 백기, 오기, 대부 문종)은 공을 이루고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재앙을 입었습니다. 이른바 '펼 줄만 알고 굽힐 줄 모르며, 앞으로 갈 줄만 알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이지요. 범려는 이러한 이치를 알아 초연하게 세상을 떠나 도 주공이 되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상군, 백기, 대부 문종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길흉을 알 수 있다.'라고 합니다. 저 네 사람이 화를 입었는데 당신은 어찌 거기에 머무르려 하십니까? 당신은 이 기회에 재상의 인수를 되돌려 어진 사람에게 물려주도록 하고 물러나 바위 밑에서 냇가의 경치를 구경하며 살지 않습니까.  

…(중략)… <역>에 '높이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칠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며, 펴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고,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은 이 점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범저는 재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충분히 공을 이루었고 과거의 치욕도 모두 갚았으니 이제 더 이상 이루고자 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리를 누가 이었을까? 바로 채택이었다. 


<주역>은 고대 사회에서 점을 친 결과를 적어둔 짧은 점괘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길흉화복을 점치는데서 출발한 이 책은 나중에는 사물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이 변화를 ‘역易’이라 하는데 보통 ‘주역周易’에는 ‘세 가지 변화(三易)’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간이簡易, 이 변화의 양상이란 쉽고 평이하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큼 간단한 사실이 어디 있는가. 변역變異, 이 변화의 양상은 하나에서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그러나 불역不易, 이 변화란 결코 변하지 않는 원칙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변하나 변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보편적인 변화를 처세의 원리로까지 확대하기도 하는데 채택의 말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 변화에 내던져지지 말고 스스로 변화를 품어야 한다. 채택은 건괘乾卦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괘는 용이 점차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괘의 효사爻辭를 보면 이렇다.


초구 잠긴 용은 쓸 수 없다.
구이 용이 땅 위에 나타났으니 훌륭한 인물을 만나다..
구삼 군자는 종일토록 노력하니 저녁까지 반성하면 위태로움에 처해도 허물이 없다.
구사 연못으로 뛰어오른 용이 있으니 탈이 없다.
구오 용이 하늘 위로 나니 훌륭한 인물을 만나다.
상구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한다. 

初九 潛龍勿用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 厲 无咎
九四 或躍在淵 无咎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上九 亢龍有悔


이 가운데 이효二爻와 오효五爻가 가장 좋은데 이는 중中을 중시 여기는 태도와 연관이 깊다. 중을 유지하는 법이란 거꾸로 지나침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높이 올라갔다면 스스로 내려올 것. 어차피 내려오는 것이 똑같다면 화를 입고 곤두박질치는 것보다 스스로 내려와 화를 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겸양, 스스로 물러남이란 최선의 덕이다. 


어쨌든 사마천은 범저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의 최상부까지 올라간 사람이 갖춰야 하는 미덕을 역설한다. 그리고 고대 중국으로부터 이어진 중요한 지혜를 함께 전하고 있기도 하다. 중심을 잃지 말 것. 진나라의 상태가 쌓아놓은 계란과 같다며(秦王之國危於累卵) 균형감을 잃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도 범저였다. 사마천은 진의 통일이 단순한 무력에 의한 폭력의 결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은연중에 전한다. 바로 균형을 잃지 않은 채 조금씩 나아간 결과라는 것. 그 기술이 있었기에 진은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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