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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8. 2021

여불위, 천금으로 천하를 샀으나

부국강병 일통천하 6

열 배 부유한 사람 앞에는 스스로를 몸을 낮추고 백 배 부유한 사람은 두려워하고, 천 배 부유한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 부유한 사람에게는 하인이 되니 이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가난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하는 데는 농사보다는 공업이 낫고, 공업보다는 상업이 낫다. …(중략)… 이를 보건대 부유함에는 정해진 일이 없고, 재물에도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못난 자에게는 산산이 흩어진다. 천 금을 가진 자는 한 고을의 군주에 견줄만하고, 수 만금을 가진 자는 왕에 버금가는 즐거움을 누린다.  이들이야 말로 '소봉素封'이라 일컬을 만한 자가 아닐까. 

<화식열전>


<사기>의 맨 끝, <화식열전>은 그 자체로 매우 독특하다. <열전>은 보통 구체적인 인물을 다루지만, <화식열전>은 부를 추구하여 이룬 인물들과 더불어 당대의 경제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한편 여기에서는 사마천의 태도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보통 고대의 사상가들은 부유함보다 다른 가치들을 더 높이 숭상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부의 현실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보다 만 배나 큰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마치 군왕에 견줄 수도 있을 정도라고. 돈이 없어 궁형을 택해야 했던 사마천의 입장에서 이런 현실이 어떻게 보였을까? 


막대한 부를 쌓아 군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린 이들을 두고 사마천은 ‘素封’이라 말한다. 열전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이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바로 진의 여불위이다. 그는 여러 곳을 오가며 많은 돈을 모았다. 상인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조나라 수도 한단에 와 있던 자초를 만난다. 


당시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진나라의 소양왕 40년, 태자가 죽자 42년 둘째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에게는 여러 부인과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는 여인을 유독 사랑하여 그를 정부인으로 삼고 화양 부인이라 부른다. 자초는 태자의 수많은 아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왕위 계승에서도 꽤 후순위의 인물이었다. 


여불위가 한단에서 장사하다가 그를 보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다. 

"이 진기한 재물은 사 둘 만하다."

그리고 자초를 찾아가 설득했다.

"나는 당신의 가문을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자초는 웃으면서 말했다. 

"먼저 당신 가문을 크게 만든 뒤에 내 가문을 크게 만들어 주시오."

여불위가 말했다.

"당신이 모르는 모양인데, 제 가문은 당신 가문에 기대어 커질 것입니다."

<여불위열전>


여불위는 자초를 만나 그의 계책을 털어놓는다. 태자의 정부인 화양부인에게는 후사가 없다. 그러니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 그의 양아들이 되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는가. 내가 천금을 투자하여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서 당신을 왕으로 만들겠다. 여불위는 천금을 내어 반은 자초에게 주어 빈객을 사귀도록 했고, 나머지 반으로는 진귀한 선물을 사서 화양부인에게 보낸다. 결국 여불위의 계책대로 자초가 태자의 후사가 된다. 


소양왕은 50여 년 간 나라를 다스린다. 결국 태자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1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가 바로 효문왕이다. 그러나 효문왕은 아버지 소양왕의 장례를 치르고 며칠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태자의 죽음으로 자초, 장양왕이 진나라의 임금이 된다. 이런 상황 때문일까? 후세에 전하는 야사에는 여불위가 효문왕을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장양왕 역시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죽는다. 그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영정은 고작 13살에 왕위에 오른다. 당시 여불위는 재상이 되어 십만 호에 봉해지고, 문신후라 칭해진다. 시황제는 어렸을 적 여불위를 매우 따랐다. 그를 중부仲父,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불위는 진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환공의 관중도 중부라 불렸으며, 앞서 진소양왕도 범저를 중부라 불렀다. 그러나 여불위는 어린 임금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둘과는 달랐다. 게다가 앞의 둘은 갖은 고초를 겪고 끝내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쳐 보였던 인물이었던 반면 여불위가 그토록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일찌감치 자초에게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어 그를 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후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이는 진시황의 어머니와 얽힌 일이다. 내용인즉 여불위의 무희 가운데 하나가 아이를 가졌는데, 여불위 집에 와 함께 술을 먹던 자초가 그를 보고 반해 여불위에게 그녀를 요구했단다. 자신이 총애하는 무희마저 요구하는 자초에게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으나 이미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자초의 요청을 들어준다. 결국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자초의 아내가 되었고 그가 낳은 이가 훗날 진시황이 된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 된다.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따져볼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자. <본기>에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 했는데, 열전에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 한다. 어째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실린 것일까? 이런 차이는 서로 다른 두 욕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본기>가 보다 객관적이고 건조한 눈으로 역사를 본다면, <열전>은 보다 열린 눈으로 역사를 본다. 


사실과 상관없이 여불위와 진시황을 둘러싼 이야기는 후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것뿐인가. 사마천은 진시황이 어렸을 때에도 여불위와 진시황의 어머니가 빈번히 몰래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時時竊私通)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이런 기록까지 있다.


진시황이 차츰 장년이 되어 가도 태후는 음란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그것이 발각되어 자기에게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음경이 큰 노애라는 사람을 몰래 찾아 사인으로 삼고, 때때로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노애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서 걷게 하였다. 태후가 그 소문을 듣게 하여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 것이다. 태후는 소문을 듣자 정말로 사람들 몰래 그를 얻고 싶어 하였다. 여불위는 노애를 바치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부죄(남자의 성기를 제거하는 형벌)에 처하도록 허위로 고발했다. 여불위는 또 태후에게 은밀히 말했다.

"거짓으로 부형을 받게 하여 부릴 수 있게 되면 급사중(궁궐에서 급사 일을 하는 관리)으로 삼으십시오."


결국 태후와 노애는 은밀히 두 아들까지 낳았다. 이들은 왕이 죽은 뒤 그 아들들로 후사를 잇겠다는 생각까지 품었는데 그것이 발각되어 결국 삼족이 멸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 일로 태후는 옹으로 내쫓겼고, 여불위는 촉으로 내쫓겼다. 촉땅에 물러난 여불위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마천 당시에는 아마 진시황과 여불위, 태후와 노애에 얽힌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이야기를 글로 옮겼을 테다. 실제로 <사기>는 당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 표현을 풍부하게 담았다. <사기>가 역사를 넘어 이야기 혹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부분 때문이다.


여불위는 앞서 소개한 전국사공자처럼 천하의 빈객을 불러 보았다. 여불위는 이들에게 책을 짓도록 명한다. 이렇게 만든 책을 <여씨춘추呂氏春秋>라 불렀다. 그는 이 책을 진의 수도 함양의 시장 문에 걸어놓고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말한다.(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일자천금一字千金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천금을 들여 자초를 임금으로 만들었고, 자신은 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이제는 천금과도 같은 책,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망라한 책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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