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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5. 2021

짐은 역사 위에 있노라

제국을 열고 만세를 꿈꾸다 3

유가의 욕망이라 함은 유가 역시 천하경영에 참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식에게도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하물며 관리들은 어떻겠는가. 천하경영에 참여하려면 황제의 수족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유가는 황제의 수족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설사 황제의 소족이 되더라도 그 비전만은 유가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진시황에게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가의 비판, 그리고 진나라의 급속한 몰락으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비록 최초의 통일 황제라고 하나 통일 이후의 진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를 폭군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00년 간 그를 폭군으로 평가한 것은 유가의 관점에 따른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다. 그의 제위 시기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진과 조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장평전쟁인데 이 전쟁은 기원전 260년에 끝났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크게 이긴, 나아가 수십만을 몰살시킨 그 참혹한 전쟁의 이듬해에 태어난 것이다. 그가 조나라에서 어린 시절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사기>는 그가 조나라 땅을 점령했을 때 원한을 맺은 사람을 모두 생매장했다고 전한다. 


사마천은 그의 아버지가 정식 태자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소양왕이 죽은 뒤에야 어머니와 함께 진나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그렇게 보면 기원전 250년에야 조나라에서 진나라로 돌아온 셈이다. 게다가 돌아온 지 4년 만에 기원전 246년에 제위에 오른다. 고작 13살의 나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태후가 셋이었다. 아버지 장양왕을 후사로 세운 화양태후, 그리고 장양왕의 생모 하태후, 그리고 자신의 생모 제태후. 게다가 문신후 여불위와 장신후 노애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역사에 길이 남을 제왕이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6년째 되는 해에는 동쪽의 다섯 나라가 연합군을 상대해야 하는 일까지 있었다.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가 진을 공격하였으나 함곡관을 넘지 못했다. 7년 하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8년엔 동생 장안군 성교가 모반하였다. 9년에 관례를 치르고 검을 찼다. 그해 노애의 세력을 몰아내고 태후를 옹땅으로 보냈고 이듬해 10년에는 여불위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축객령을 내렸다가 이사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그 해였다. 이후 진나라는 파죽지세로 동쪽으로 세력을 펼친다.  


제위 17년엔 한을, 19년에는 조를, 22년에는 위를, 24년에는 초를, 25년에는 연을, 26년에는 제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결국 동쪽의 육국을 모두 통일한다. 그가 13살에 왕위에 올랐음을 기억하자. 게다가 7~8년은 여불위 등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진시황이 나서 수백 년의 전란을 끝내는 데는 불과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국도 채 20년을 가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 생각 거리를 던진다. 그러나 그가 천하를 통일했을 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군대를 일으켜 포학한 반도들을 주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섯 나라 왕이 모두 자신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나의]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룬 공적에 걸맞지 않게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그대들은 제왕의 칭호를 논의하라."

<진시황본기>


육국을 통일한 일은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주의 천자는 스스로 왕王이라 일컬었지만 이제 그 칭호는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 그보다 높은 이름이 필요하다. 과연 새로운 이름은 무엇이어야 할까? 


역사에 유래 없는 새로운 업적을 세웠으니 새로운 이름을 만들자. 이에 신하들이 들고 온 것은 태황泰皇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치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고대의 신화에서 이름을 꺼내와 붙인다. 저 옛날 오제가 있었으니 황皇을 남겨두고 여기에 '제帝'를 붙이자. 결국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황제皇帝'라는 호칭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이름을 만든 것은 자신의 권력을 전혀 새로운 토대 위에 놓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요순과 주나라로 이야기되는 고대의 이상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 이때의 ‘황’은 삼황의 칭호이기도 하지만 ‘환하게 빛나는 모양’을 가리키는 형용사로서 신이나 조상과 같이 위대한 존재를 형용하는 공식적인 수식어였다. ‘황제’는 빛나는 초월적 존재의 이름이다. 진시황은 인간 세계의 수장을 넘어 세계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다. 진시황의 칭제稱帝는 새로운 통일 중국의 지배자로서 세심한 정치적 고려를 거쳐 선택된 것이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신의 명칭을 채택함으로써 현실적 권력에 강한 정통성을 부여했다.

<황제란 무엇인가?>, 윤성훈 :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부록


주나라는 천하를 하나의 집안으로 보았다. 실제로 주왕周王은 봉건 제후를 대표하는 종가宗家였다. 각 제후국에서는 다시 제후를 중심으로 한 가계가 구성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왕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천하라는 집안의 대표였다. 그렇기에 공자와 맹자는 그토록 효제孝悌를 강조한 것이었다. ‘효제충신’은 각기 가家와 국國, 벗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결국 ‘국가國家’라는 커다란 집안(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공맹과 같은 유가는 고대의 윤리를 회복함으로 이 혼란을 타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의 체제는 이미 작동을 멈춘지 오래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진시황이 내놓은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였다. 


그는 동시에 '시법謚法'을 없애자고 말한다. 시법이란 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에 역사적 평가를 입혀 그를 부르는 칭호를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윤리적 평가가 따라붙기 마련. 그러나 시황제는 자식이 아비를, 신하가 군주를 평가할 수는 없다며 이를 없애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시작이니 시황제, 이후로 숫자를 붙여 이세, 삼세 … 만세까지 가자고 말한다.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 때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 때에는 호가 있다가 죽으면 행적에 의거해 시호를 삼았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논의하는 것이나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은 시황제始皇帝라 부른다. 후세부터는 수를 세어 이세二世, 삼세三世에서 만세萬世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하도록 하라."


결국 진시황이라는 호칭은 그 누구도 아닌 그 스스로 지은 이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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