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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5. 2021

황제의 유산

제국을 열고 만세를 꿈꾸다 4

이름은 본디 제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을 만드는 일이 흔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이름은 다른 이가 지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름은 내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 역사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더더욱 그렇다. 임금들은 그들이 눈감는 순간까지 훗날 자신이 어떻게 불릴지 몰랐다. 어떤 소망이 없었으랴마는 전적으로 자식과 신하들, 나아가 후대 사람들에게 달린 일이었다. 


반대로 시황제는 스스로의 호칭을 만들었다. 이는 신하와 자식에게 평가받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러나 절반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세황제라는 호칭은 그의 막내 아들 호해가 이었으나, 삼세황제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만세의 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황제의 유산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진시황이 황제를 천명한 이후, 이른바 청의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황제 체제는 2천 년 넘게 지속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공식적으로 황제의 자리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황제를 복위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황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안문 광장에 걸린 커다란 사진, 종신 권력을 보장받은 오늘날 중국의 지배자를 보면 황제가 과연 사라졌는가 의문이다. 황제의 그림자는 여전히 중국에 드리워져 있다. 


진시황은 황제라는 호칭을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통일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 걸쳐 개혁을 단행한다. 우선은 오덕五德/오행五行 관념에 따라 주나라의 화덕火德을 꺾는 수덕水德을 진나라의 상징으로 삼고 모든 것을 이에 맞추어 바꾸었다. 예를 들어 의복과 깃발을 검은색으로 만든 것, 숫자 6을 기준으로 도량형을 정한 것 등이 그렇다. 


황제 1인의 지배를 꿈꾸었던 만큼 그는 행정 제도도 손봤다.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었다. 이른바 ‘군현제郡縣制’의 시작이다. 중앙에서 관리를 보내 지역을 통치하려고 하였다. 과연 얼마나 실효적 지배가 가능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킨 것도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천하가 하나의 말과 하나의 기준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게다가 그는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넓은 길을 닦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진시황은 수도 함양으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수 차례 지방을 돌아다녔다. 이 역시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수도에서 지방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으므로 그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진시황은 그 수행길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는 매일 엄청난 양의 문서를 직접 처리했다고 한다. 매일 무게를 달아 문서를 처리하고 마치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않았단다. 이를 보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과로사가 아닐까. 권력의 중심에 홀로 있으면서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안감, 나아가 직접 지방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일을 처리하기 까지. 따지고 보면 그는 이전의 폭군들처럼 주지육림의 화려한 삶을 별로 누려보지도 못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 한참이 지나서야 수도 함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루도록 하자. 그의 유해는 여산에 묻혔는데 이 무덤은 제위에 올랐을 때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진시황본기>는 그의 무덤에 대해 이렇게 그리고 있다.


9월에 진시황을 여산에 안정했다. 진시황은 막 제위에 올라 여산을 뚫어 다스렸고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에 칠십여만 명을 이주시켜 땅을 깊이 파게 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설치했으며, 궁관, 모든 관원, 기이한 기물, 진귀하고 특이한 물건들을 만들어 운반해서 가득 보관하게 했다. 기술자에게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과 화살을 만들도록 명하여 그곳에 접근하여 파내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 온갖 내, 큰 강, 넓은 바다를 만들어, 기계에 수은을 집어 넣어 흐르게 했다. 위로는 천문을 갖추고 아래로는 지리를 갖추었다. 사람 모양의 물고기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미리 계획했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사마천의 기록 이후 이 무덤의 증거는 한 동안 전설로 여겨졌다. 그러다 1974년 우연히 우물을 파다 발견된다. 중국 시안 근처의 병마용, 혹은 진시황릉이라 불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병마용은 그를 수호하는 군대를 상징하는 사람과 말을 흙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후대 사람을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수와 세밀함이었다. 게다가 다양한 부장품이 쏟아져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시황이 직접 묻힌 묘실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있다. 자칫하면 부장품 등이 외부 공기와 접촉하며 순식간에 부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황제의 릉이 있으나 그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만큼 그는 거대한 역사적 유물로 오늘날까지 말을 건네고 있다. 만세토록 가리라는 그의 제국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가 꿈꾸었던 천하의 모습이 모두 허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가 통일제국을 이루고 황제체제를 천명한 이후 중국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조각나며 군벌, 군왕이 등장하지만 중원의 통일의 이상은 수많은 인물의 마음을 빼앗았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그 말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자. 어떻게 중국이 찢기었는지, 아니면 하나를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접어두자. 이 하나의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시황에까지 이른다. 왜 중국은 여러 나라로 나뉘지 않는가? 설사 나뉘었다 하더라도 또 다시 하나의 제국의 모습을 갖추는가. 바로 진시황의 유산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문제다. 오늘날 중국은 여러모로 불편한 이웃이다. 문제는 너무 가깝다는 데 있다. 이웃이 문제면 이웃을 내쫓거나 내가 집을 옮기거나 하면 되지만, 이웃 나라를 바꿀 수도 나라를 통째로 들어 옮길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구나 수천 년간 뒤엉킨 역사까지. 필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다. 중국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는 또 다른 안목이 필요한 법이다. 진시황의 이야기를 '그땐 그랬지' 하고 대충 읽어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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