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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5. 2021

앞으로 가도 죽고 뒤로 가도 죽으니

제국을 열고 만세를 꿈꾸다 6

조고는 이세황제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조고는 사위 염락을 시켜 병사를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가게 한다. 당황한 이세황제가 주변 사람을 부르나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이세황제는 화가 나서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을 불렀으나, 측근들이 모두 두려워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곁에 환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시중들며 감히 달아나지 않았다. 이세황제가 안으로 들어가 일러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일찌감치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환관이 대답하여 말했다.

"신이 감히 아뢰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이 일찍 아뢰었다면 이미 처형되었을 것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진시황본기>


그래도 충신 한 명이 이세황제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이세황제 곁을 지켰으나 그가 수많은 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세황제는 염락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승상을 만나 보면  안 되겠는가?"

염락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이세황제가 말했다.

"나는 군郡 하나를 얻어 왕이 되길 바라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말했다.

"만호후萬戶侯가 되길 바라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았다. 또 말했다.

"아내와 자식과 함께 백성이 되어 여러 공자와 나란히 대우받고 싶소."

염락이 말했다.

"신은 승상의 명을 받아 천하를 위해 당신을 처단하는 것이니, 당신이 말을 더 하더라도 나는 감히 보고할 수 없소."

그러고는 병졸들을 이세황제에게 나아가도록 지시하자, 이세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염락은 이세황제를 ‘족하足下’라고 하며 얕잡아 부른다. 폐하陛下였던 그의 마지막은 이처럼 보잘것없었다. 황제가 아닌 제후, 아니 평민처럼 살겠다는 요청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세황제를 죽음에 몰아넣고 조고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옥쇄를 가지고 궁에 올랐으나 세 번이나 궁이 무너지려 했단다. 결국 그는 시황제의 손자 자영을 후사로 세운다. 자영은 조고의 전횡을 지켜보고 있었던 바, 꾀를 내어 조고를 죽인다.


그리고 자영은 이후 패공沛公 유방에게 항복한다. 목숨을 건지는가 싶었지만 유방을 뒤쫓아온 항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결국 진시황의 아방궁도 불탔다고 전해진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라 부르는 진은 고작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만세萬世를 가고자 했던, 그 제국과 함께 신선이 되어 불사不死의 몸으로 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욕망은 이렇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의 욕망의 몰락은 새로운 욕망의 출현을 재촉하는 법.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자 진승과 오광이 이름을 떨친다. 


진승과 오광은 본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밭갈이하는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진승이 함께 일하던 머슴에게 나중에 부귀해지더라도 서로 잊지 말자고 했는데, 모두가 비웃었다. 남의 밭을 갈며 일하는 놈이 무슨 부귀타령이냐고. 지금이야 개인의 능력, 노력, 운으로 사회적 신분이 달라질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런 진승의 말을 곱게 듣는 이는 없었다. 이런 반응에 진승은 ‘아! 뱁새가 어찌 고라니의 뜻을 알까(嗟乎 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진승은 오광 등과 함께 변방을 지키는 요역을 위해 어양이라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비가 와서 기일에 맞게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진나라의 강력한 법에 따르면 기한을 어기면 목숨을 잃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 도망가도 죽고, 큰 일을 벌여도 죽는다. 똑같이 죽는 일이라면 나라를 세워 죽는 게 어떤가?"

<진섭세가>


어차피 죽을 바에야 큰 일을 하다 죽어보자. 이들은 꾀를 내어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와 초의 장군 항연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나아가 진승은 스스로 왕을 자처하며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운다. 이때 그가 자신을 이끄는 관리를 죽이고 한 말이 대대로 전해진다.


"우리는 비를 맞아 기한을 어기게 되었다. 기한을 어기면 참형을 당한다. 설사 참형을 당하지 않더라도, 노역을 하다 죽는 경우가 열에 여섯일곱은 된다. 장사라면 죽지 않아야겠지만, 죽는 다면 크게 명성을 떨치고 죽어야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


여기서 그 유명한 ‘왕후장상녕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말이 나왔다. 이전까지 핏줄에 의해 왕이나 제후, 장군과 재상이 정해졌다면 이제는 그런 것이 다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후 밑바닥에서 도모하여 일어나는 사람의 꿈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품은 야망에 비해 턱 없이 작은 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을 자처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죽임을 당한다.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다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진승이 일으킨 반란은 장작더미에 불을 던진 꼴이 되었다. 그를 이어 각 지역에서 반란군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비록 그는 실패했으나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자리에 오른 이가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바로 유방이 그 첫 번째 인물이다. 


사마천은 진승에 대한 기록을 <세가>에 담았다. 이는 하나의 파격이었다. 진승이 왕을 자처했지만 왕 혹은 제후에 걸맞은 역사적 평가를 얻은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술 방식은 후대에 적지 않은 논란을 낳았다. 세가가 넣을 수 없는 인물이 세가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사마천을 공격하는 근거로 삼았다. 


<세가>에는 진승과 더불어 <세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승의 이야기를 담은 <진섭세가> 바로 앞에 있는 <공자세가>이다. 전승에 따르면 공자는 생전에 노나라의 ‘대사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제후국의 대부大夫격에 해당하는 그가 어찌 <세가>에 이름을 올렸을까? 이는 한대漢代에 이르러 그를 소왕素王, 즉 실제로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왕이나 마찬가지인 인물로 추앙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이 둘이 본디 <열전>에 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70열전이 아닌 72열전이 되어 당대의 상수象數적 세계관에 딱 들어맞는다. 과연 사마천이 이러한 점까지 고려했을까. 그러나 이를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것이 그가 천문을 연구하며 상수학에 나름 정통했을 것이라는 점, 게다가 <본기>에서도 딱 두 자리가 논란이 일기 때문이다. 바로 <항우본기>와 <여태후본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진승은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왕은 천명을 받거나 적어도 누군가에 의해 공인되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덕분에 훗날 황제의 자리는 누구의 것이나 될 수 있었다. 하다못해 오랑캐도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 땅의 선비들은 어찌 호로자식이 황제가 될 수 있느냐며 길길이 뛰었으나, 이미 진승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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