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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20. 2021

항우, 천자의 자리를 탐한 자

중국적 영웅의 두 얼굴 1

<본기>는 왕조와 천자의 기록을 담았다. <오제본기>로 시작하여 <은본기>, <하본기>, <주본기>, <진본기>로 이어지며 이후로는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진시황본기>, <항우본기>, <고조본기>, <여태후본기>를 이어 한나라의 천자들이 이름을 잇고 있다. <효문본기>, <효경본기>, <효무본기>까지. 


이 가운데 <항우본기>와 <여태후본기>가 논란을 낳았다. 항우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가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은 ‘서초패왕西楚霸王’이었을 뿐이다. 여태후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이 아닌가. 때문에 반고는 <한서漢書>에서 항우를 <진승항우전陳勝項籍傳>으로 끌어내렸다. 다만 여태후의 경우에는 그의 실질적 지배를 인정하며 <고후기高后紀>를 따로 붙였다. 당의 역사학자 유지기 역시 <사통>이라는 책에서 사마천이 항우의 이야기를 <본기>에 기록한 것을 문제 삼았다. 후대 역사가들이 보기에 항우를 천자와 제왕의 이야기에 끼워 넣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였다.


후대 사람들의 평가는 접어두자. 사마천 당대 사람들은 항우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유씨 천하가 된 한나라에서 항우의 이야기를 <본기>에 넣은 것은 과연 어땠을까? 그것도 한나라의 창업자 유방 앞에 놓은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을지.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항우본기>가 단연 빼어난 문장과 구성으로 읽는 이를 사로잡아 버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조가 <사기>에서 빼어난 부분을 뽑아 엮은 <사기영선>은 <항우본기>로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고조본기>, 즉 유방의 기록은 쏙 빠져있다. <항우본기>에 이어 <소상국세가>, <유후세가>로 이어진다. 항우, 그리고 소하와 장량의 이야기만으로 유방과 얽힌 이야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 테다. 이렇게 정조의 <사기영선>은 항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유방을 조연으로 처리했다. 


항우와 유방 가운데 누가 더 매력적인가. <사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질문이다. 사마천은 누구에게 더 매력을 느꼈을까? <항우본기>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보면 그의 생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일부는 사마천이 유씨 천하가 된 한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사기>를 엮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항우본기>는 항우에 대한 짧은 소개와 그의 성격을 대표하는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항적은 하상下相 사람이다. 자字는 우羽, 그가 처음 군사를 일으킨 것은 24살이었다. 


항우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는 그의 자字이며 본디 그의 이름은 항적項籍이다. 그는 24살에 전장에 나아가 8년간 천하를 뒤 흔들었다. 3년은 진을 무너뜨렸고, 5년은 유방과 천하를 두고 다투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기백을 지니고 있었다. 


항적이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마치지 못했다. 검술을 배웠지만 마찬가지로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화를 내자 항적이 말했다. "글은 이름을 쓸 줄 알면 그만입니다. 검술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니 배울 거리가 아닙니다. 만인을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에 항량이 병법을 가르쳤다. 항적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대강 이해하자 더 배우려 하지 않아 마치지 못했다. 


항우는 글공부, 검술이나 병법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했다. 과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영수의 경우는 어떤 것도 끝마치지 못하는 항우의 부족한 기질을 보여준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그에게는 글과 검, 병법이 필요 없는 게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패배의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사마천이 그를 단순한 패배자로 서술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사마천은 어떤 정념을 투사하여 그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항우가 어린 시절 멀리서 진시황의 행차를 바라보는 일이 있었다. 수많은 무리가 뒤따르는 모습을 보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자리를 차지해서 대신할 수 있겠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작은 아버지 항량을 따라다녔다는 기록만 보이기 때문이다. 항량의 아버지, 그러니까 항우의 할아버지는 왕전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장수 항연이었다. 항량은 항우의 저 말을 듣고는 입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삼족이 멸하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저 말을 뱉었을까? 그는 키가 팔 척이 넘고 커다란 솥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에 재주와 기개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才氣過人)고 한다. 


진승의 반란으로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난다. 항량과 항우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회계 군수를 죽이고 군권을 잡는다. 진승의 실패를 목도한 항량은 범증의 의견에 따라 초나라의 후손을 왕으로 세운다. 초왕의 후손이 왕이 되었고, 초나라 장수의 후손이 장수가 되었으니 영 근본 없는 무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항연은 이후 연이은 승전에 자만하다 결국 진나라 군대를 맞아 죽는다. 이때 이미 유방 역시 반란군의 한쪽 세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반란군의 상징적인 수장인 초왕은 유방에게는 함곡관을 치고, 항우에게는 북쪽 조나라 땅의 거록성을 포위한 진나라 군대를 칠 것을 명한다. 당시 거록성으로 진격한 군대의 상장군은 송의였고, 항우는 부장이었다. 송의는 강 건너에서 싸움을 지켜볼 뿐 진나라 군대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에 항우는 새벽에 송의의 막사를 찾아가 그의 목을 베고 군권을 잡는다. 그는 군사를 이끌어 강을 건넌 뒤 결사의 의지를 다진다.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사르는 것은 물론, 배를 침몰시켰다. 식량은 사흘 분만 지니도록 했다. 이제 오직 전진만 있을 뿐! 바로 여기서 파부침주破釜沈舟 혹은 파부침선破釜沈船이 나왔다. 


항우는 진나라 군대를 깨뜨린다. 오직 자신의 군대만으로. 항우의 승전 이후 장수들이 무릎으로 기어 항우에게 찾아왔다고 한다. 이 승리로 그는 반란군의 수장이 된다.


거록을 구하러 온 군대가 열 곳이 넘었다. 그러나 감히 싸움을 걸지 못했다. 항우의 군대가 진나라 군대를 칠 때 여러 장수들은 보루를 쌓고 지켜볼 뿐이었다. 항우의 초나라 군사는 한 사람이 열 사람을 상대할 정도였다. 이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자 지켜보던 모두 군사들이 두려워 떨었다. 진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항우가 장수들을 불렀다. 장수들은 진영에 이르자 무릎으로 걸으며 나오지 않는 자가 없었고 감히 항우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항우가 제후들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항우의 휘하에 속했다.


이렇게 진나라 군대를 깨뜨린 후 진나라 땅으로 들어가려는데 함곡관이 닫혀 있는 게 아닌가. 유방이 먼저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 수도를 함락시키고 함곡관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앞서 초왕은 관중을 먼저 정벌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관중, 진나라 땅은 이제 유방의 것이 되는 것일까? 


항우는 크게 노하여 함곡관을 무너뜨린다. 그의 군대도 함양에 이르렀다. 항우의 군대와 유방의 군대가 대치하는 상황. 이때 항우의 군대는 사십만, 유방의 군대는 십만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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