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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20. 2021

홍문연, 술자리 눈치게임

중국적 영웅의 두 얼굴 2

항우는 불패의 맹장이었다. 항우와 유방이 맞붙는다면 유방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방은 함곡관을 걸어 잠근 것일까? 항우의 화를 돋우는 일인 줄 몰랐을까?


유방이 함양을 공략했을 때는 이세황제와 조고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유방의 군대가 이르자 진시황의 손자 자영은 흰 수레를 타고 황제의 옥새를 들고 와 항복했다. 자영은 목에 끈을 묶었는데 유방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유방은 진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그는 진나라의 궁전에 들어가 미녀와 보물을 탐했다 한다. 화려한 궁궐에 취한 그를 끌어낸 것은 번쾌와 장량이었다. 번쾌와 장량이 아니었다면 유방 역시 진의 궁전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리라.


함곡관을 걸어 잠근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을 테다. <항우본기>에서는 한 인물이 유방을 설득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진의 영토는 대대로 풍족하며 천혜의 요새였다. 전국시대 제후들의 군대는 번번이 함곡관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설사 함곡관을 넘었다 하더라도 도리어 진의 군사들에게 공격을 받아 군대를 물려야 했다. 


그러나 상대는 항우였다. 거록성의 전투를 승리한 그의 군대는 함곡관마저 깨뜨린다. 유방의 군대를 맞아 싸움을 벌이려는 때 새로운 사건이 펼쳐진다. 


항우의 큰아버지 항백과 유방의 모사 장량의 중재로 술자리가 벌어진다. 홍문에서 벌어진 이 연회를 홍문연鴻門宴이라 한다. 형식상 유방이 항우에게 사과하는 자리였다.


범증은 아부라고 불릴 정도로 항우가 따르는 인물이었다. 범증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으나, 항량 때부터 항우를 도운 모사였다. 그는 유방을 살려두면 훗날 재앙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는 이 기회에 유방의 군대와 싸움을 벌여 그를 해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이 연회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그는 항우에게 연회중 기회를 보아 유방을 죽이자고 한다. 수차례 눈짓을 보내 항우를 재촉했으나 항우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범증은 항우의 사촌 아우 항장을 조용히 부른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술잔을 올리고 칼춤을 청한 뒤 상황을 보아 유방을 찌르라는 것. 살기 어린 항장의 칼춤이 시작되었다. 서슬 퍼런 항장이 칼날이 번뜩이자 이번엔 항백이 나선다. 항장 한 사람 만으로는 흥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항장이 유방의 목을 노리면 항백이 몸으로 막는 식이었다.


장량은 진영 밖으로 나가 번쾌를 부른다. 항장 칼춤을 추며 유방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는 칼과 방패 차고 연회자리에 난입하기로 한다. 


"급박한 상황이니 내 들어가 주군과 생사를 같이해야겠소."


창을 든 병사들이 번쾌를 막았으나 번쾌는 방패로 그들을 쓰러뜨린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연회가 벌어지는 장막 안으로 들어간 순간을 사마천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번쾌는 안으로 들어가 장막을 들추고 항우가 있는 서쪽을 향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쭈뼛 섰으며 날카롭게 찢어진 눈으로 항우를 노려보았다. 항우는 칼을 만지며 무릎을 세우고 말했다.

"너는 누구냐?"

장량이 말했다.

"패공(유방)의 수레를 끄는 번쾌라는 자입니다."

"장사壯士여 술 한잔을 내리노라."


번쾌는 선 채로 한 말이나 되는 술을 마셨다. 항우가 돼지 넓적다리를 주자 번쾌는 방패 위에 돼지 넓적다리를 놓고는 칼로 썰어 먹었다. 이에 항우는 번쾌에게 더 술을 권한다. 


"장사여 더 마실 수 있겠는가?"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거늘 어찌 술을 사양하겠습니까!(臣死且不避,卮酒安足辭!)"


기회를 틈타 번쾌는 항우에게 따져 묻는다. 포악한 진왕을 맞서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유방이 먼저 함양에 도착했으나 이는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된다'는 초왕과 여러 장수들의 약속 때문이었다. 함곡관을 걸어 잠근 것은 유사시를 대비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데도 죄 없는 사람, 유방을 죽이려 하다니 옳은 일인가? 당신이 포악스런 진왕과 다를 게 무엇인가. 


홍문연의 술자리는 결코 흥겨운 자리는 아니었다. 형식상 유방이 항우에게 사과하는 자리였지만 유방은 목숨을 걸고 술자리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범증과 항장은 유방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항백이 몸을 던져 겨우 막고 있는 상황. 항우는 말없이 술을 마실 뿐이었다.


흥미롭게도 사마천은 홍문연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 유방에 대해 아무런 묘사를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유방을 노리고 지켜보고 있지만 <사기>는 유방의 언행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결국 이는 독자의 몫이다. 목숨을 건 연회 자리에서 유방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눈앞에 번뜩이는 칼날을 보며 그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항우도 별 말이 없다. 칼춤을 추겠다는 항장의 말에 간단히 허락할 뿐이다. 역시 독자는 항우의 속내와 표정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번쾌의 난입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두 말 없는 사내,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벌어지는 칼춤은 뒤로 밀려나고 항우와 번쾌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쭈뼛 선 머리털과 찢어진 눈. 번쾌의 표정은 이 연회에 감춰진 음모를 드러내고 있다. 칼과 방패를 든 이 호한을 맞아 항우는 칼을 만지며 무릎을 세웠다. 여차하면 칼을 빼었으리라. 


그러나 그가 유방을 위해 이 자리에 난입했다는 사실을 알자 항우는 그를 반긴다. 장사라며 그에게 술과 고기를 내린 것은 이 치열한 눈치게임에 지쳐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바탕 싸워 유방을 해치웠다면 그나마 나았으리라. 술자리에서 유방을 해치운다는 것은 항우에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항우야 말로 이 살벌한 술자리에서 가장 심드렁하고 무료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번쾌의 난입은 이 술자리의 음모를 폭로하는 사건이었다. 나아가 번쾌는 입을 열어 부당함을 고발한다. 번쾌의 항변에 항우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권할 뿐이었다. 


결국 유방은 틈을 내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고 그 길로 군영으로 도망간다. 기병 100여 명을 항우를 찾아왔으나 번쾌를 비롯한 무장 넷만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것도 말을 타지 않고 칼과 방패를 들고 걸어서 샛길로 돌아갔다. 돌아가며 장량에게 시간을 보아 자신이 도착할 때쯤 항우에게 돌아가 인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장량은 뒤늦게 돌아가 사과의 말을 전한다. 술에 취해 미처 인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일을 그르친 것을 안 범증은 유방이 선물로 전한 옥을 칼로 부서뜨리며 화를 냈다 한다. 


훗날 천하를 두고 다투는 초한쟁패의 주인공 항우와 유방의 술자리는 이렇게 끝나버린다. 문득 드는 질문.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살벌한 눈치게임의 술자리를 어째서 사마천은 그렇게 세세하게 기록한 것일까.


역사라는 통념에 비춰보면 이는 몇 줄로 정리될 사건에 불과하다. 실제로 유방을 기록한 <고조본기>에서는 불과 몇 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의 사과를 항우가 받아들인 내용만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항우본기>에서 동일한 사건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항우의 다양한 면모를 만난다. 사마천은 초한쟁패의 패배자로 항우를 소개하지 않는다. 홍문연은 초한쟁패의 서막을 여는 연회인 동시에 항우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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