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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21. 2021

유방, 용의 얼굴을 한 사내

중국적 영웅의 두 얼굴 4

두 영웅이 있다. 하늘이 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늘이 낸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항우가 하늘이 버린 사람이라면 유방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할만하다. <사기>는 그가 출생부터 남다른 인물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고조는 패현 풍읍 중양리 사람이다. 성은 유劉이고 자는 계季이다. 아버지는 태동, 어머니는 유온이다. 일전에 유온이 큰 연못 옆에서 쉬다가 꿈에서 신을 만났다. 이때 천둥 번개가 치며 컴컴해졌다. 태공이 가서 보았는데 교룡이 그 위에 있었다. 얼마 뒤 태기가 있어 이후 고조를 낳았다. 


<고조본기>의 시작이다. 국가의 창건자답게 신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의 아들인 셈이다. 수많은 난생설화도 있으니 이런 기록은 넘겨두자. 참고로 한나라 시대 한반도에는 고조선이 있었고, <사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보다 1,000년 넘게 앞선 글이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사기>에서 이런 신화적인 요소는 낯설다. 


이런 신화적인 부분을 걷어내고 보면 유방이라는 인물의 출생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모호하다. 항우는 24세 군사를 8년간 전장을 누비다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의 생몰 연대(BCE 232~BCE202)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유방의 경우에는 나이에 얽힌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그의 출생을 두고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대체로 항우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는데 24살, 15살 혹은 5살 연상 설까지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무엇보다 훗날 전해지는 '유방劉邦'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자字, '유계劉季'만이 전해질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형제를 부를 때 나이순으로 백伯, 중仲, 숙叔, 계季의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형제 관계를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공자의 자는 중니仲尼로,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계'는 막내의 호칭으로, '유계'란 '유씨네 막둥이'라는 뜻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은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지 않으며 이후 한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반고의 <한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요컨대 정사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훗날 후한後漢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야 유방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사타케 야스히코는 <유방>에서 시바 료타로의 주장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방邦’은 이름이라기보다는 그를 따르는 집단이 그를 부르던 호칭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말로 간단히 옮기면 '유 형님' 정도였다는 말씀. 


정리하면 유씨네 막둥이가 진나라 멸망의 혼란기 속에 어느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고, 나아가 항우와의 결전에서 승리하여 고조高祖, 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항우본기>와 <고조본기>에서 유방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그가 처음 군사를 일으킨 것이 패현이었으므로 그는 패공沛公으로 불리었으나 나중에는 파•촉•한중 지역의 왕이 되어 한왕漢王으로 불리다가 황제에 오른 뒤에는 고조高祖라 불린다.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라 할만하다. 이름도 없는 출신도 변변찮은 인물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사마천이 그리는 젊은 시절 유방의 모습은 무뢰배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는 큰 뜻을 품고 다른 사람들처럼 일하며 살지 않았다 한다. 말이 좋아 큰 뜻을 품은 것이지 나쁘게 말하면 꿈만 큰 백수나 한량이라 할만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정장亭長이라는 하급 관리가 되었으나 그리 성실한 인물은 아니었다. 술과 여색을 좋아했으며 외상으로 술을 마셨는데 몸을 가누지 못해 술에 취해 아무 곳에나 눕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 용이 보였단다. 믿거나 말거나.


그럼에도 그는 매우 쾌활한 성격에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그가 외상으로 술을 먹는 주점에는 술이 몇 배나 팔렸단다. 사람을 불러 모으고 분위기를 상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주점의 주인들은 매년 유방의 외상장부를 찢어버리고 술값을 받지 않았다. 그가 외상으로 마신 술값을 낼 리도 없고, 그가 불러오는 많은 손님들이 내는 술값으로 그의 외상을 탕감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패현에 여공呂公의 가족이 이사를 오는 일이 있었다. 여공은 패현의 현령과 친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난 부자였다. 그를 맞이하는 잔치가 열렸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축의금을 받았는데 천냥이 넘지 않는 사람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헌데 유방은 일만냥을 써서 들이밀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푼도 없었다. 좋아하는 술도 외상으로 마시는 이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진상품을 받는 관리는 이렇게 말하며 유방을 막았다.


"유계는 큰 소리만 칠 뿐, 정작 하는 일은 작습니다."


그러나 여공은 그의 관상을 보고 그를 상석에 앉혔다. 게다가 술자리가 끝난 뒤에 그를 남겨놓고는 그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여공의 말인즉, 평소에도 관상을 잘 보는데 유방만큼 좋은 상을 본 일이 없단다. 한낱 허풍쟁이 무뢰배에게 귀한 딸을 준다니! 여공의 아내가 화를 내며 반대했지만 여공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에 여공의 딸과 혼인하니, 그가 바로 훗날 여태후이다. 참고로 이때 유방을 비난했던 패현의 관리가 바로 훗날 승상의 자리에 오르는 소하蕭何였다.


<고조본기> 앞부분을 읽노라면 국가의 창건자가 갖추어야 하는 능력에 대한 내용은 별로 만날 수가 없다. 지혜롭다던가, 글을 좋아했다던가 하는 내용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이 센 무장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온통 외모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이후 지나가던 노인이 유방의 아들 딸의 관상을 보고 크게 길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유방의 관상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방은 나중에 죄수들을 호송하는 일을 맡았는데 중간에 죄수가 하나둘 도망가고 제대로 호송할 수 없자 죄수를 다 풀어주고는 남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른바 산적 두목이 된 셈이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오가며 숨어 살았는데 그때마다 그의 아내 여후가 귀신 같이 그를 찾아냈다. 유방이 있는 곳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서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나 뭐라나.


정말로 유방은 용, 천자의 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의 남다른 면모에 탄복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설사 그에게 용의 모습이 보였다 하더라도 그저 신기해했을 뿐이다. 이후의 역사를 아는 독자들이야 그것이 하나의 복선이었겠지만 유방 당대의 주변 인물에게도 똑같이 여겨졌을 리는 없다. 소하만 하더라도 유방을 허풍쟁이에 불과하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는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며 황제의 자리를 탐했다는 항우의 이야기처럼, 유방에게도 멀리서 진시황의 행차를 구경하는 일이 있었다. 황제의 수레를 보며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단다. "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항우의 말을 듣고 항량은 항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사기>는 유방의 말에 대한 반응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아무도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 설령 들었다고 한들 크게 개의치 않았을 테다. 그 역시 그저 좀 잘생긴 무뢰배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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