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적 영웅의 두 얼굴 5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처음에는 낙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장량의 제안에 따라 관중, 즉 옛 진나라 땅을 수도로 삼기로 한다. 그는 진나라 수도 함양 근처에 새로 도읍을 세운다. 장락궁長樂宮을 세웠는데 말 그대로 오랜 전란이 끝났으니 앞으로 즐겁게 지내자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평안을 빈다는 뜻에서 이 도시의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지었다.
한편 장안에 미앙궁未央宮을 짓기도 했다. '미앙未央'이란 끝이 없다는 뜻이니 새로운 통일왕조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한나라는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한 나라이기도했다. 한고조 유방이 세우고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한헌제가 제위를 넘길 때까지 40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 결과 한漢은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장안에 미앙궁이 세워졌을 때 고조 유방은 큰 연회를 벌였다.
미앙궁이 완성되자 고조는 제후 및 여러 신하를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벌였다. 고조가 옥으로 만든 술잔을 들고일어나 아버지 태상황의 장수를 축원하고 이렇게 말했다.
"옛날 아버지께서는 늘 제가 재주도 없는 데다 일도 하지 않고, 둘째 형처럼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지금 제가 이룬 것을 둘째 형과 비교하면 누가 더 훌륭합니까?"
함께 자리한 신하들이 크게 웃고 즐거워하며 모두 만세를 불렀다.
궁궐의 완성과 함께 크게 주연을 베푸는 것은 유방의 성격에 딱 어울리는 일이다. 자신의 공로를 감추지 않고, 쓸데없이 겸양 떨지 않는 것 역시 유방다운 모습이다. 그가 주도하는 술자리는 호탕하고 쾌활한 자리였으리라.
이보다 앞서 항우와의 결전을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도 낙양에서 함께 싸운 장수들과 주연을 베풀었다.
천하가 평정되었다. 5월 병사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고조가 낙양의 남궁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고조가 말했다.
"제후와 장수들은 짐에게 솔직히 말해보시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무엇이요? 또한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이요?"
고기와 왕릉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오만하시어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십니다. 그러나 항우는 인자하여 다른 사람을 아낍니다. 그러나 폐하는 성을 공격해 공을 세운 자에게 그곳을 주셨으니 천하 사람과 이로움을 나눈 것입니다. 항우는 능력 있는 자를 시기해 공을 세우더라도 땅을 나누어주지 않고 다른 사람과 이로움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항우가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려. 장막에서 계책을 내고 천 리 밖의 전장에서 승리를 얻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며 병사와 식량을 끊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오. 100만 대군을 이끌어 승리를 거두고 땅을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 빼어난 인물이나 내가 이들을 들어 쓸 수 있었던 까닭에 천하를 얻었다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를 중용하지 않았기에 나에게 패한 것이오."
앞서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써서 항우와 범증을 이간질했다. 범증은 항우에게 쫓겨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실제로 항우 곁에는 별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범증을 제외하면 경포, 포장군 등의 이름만 등장할 뿐이다. 그나마 부장으로 활약했던 경포 역시 유방 편에 붙어 버린다. 경포는 일찍이 항우가 함양에 들어올 때 선봉에서 함곡관을 깨뜨리기도 한 인물이었다.
당대 역사에 이름을 알린 여러 인물과 비교해보면 유방은 독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힘이 센 장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빼어난 혈통을 타고 나 왕으로 추대된 인물도 아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각 분야에서 유방을 압도하는 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방 스스로도 이 점을 인정한다.
'삼불여三不如'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세 가지 못난 점이라는 뜻이다. 계책은 장량만 못하고, 행정은 소하만 못하고, 군사는 한신만 못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 말은 또 다른 능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바로 용인用人, 사람을 들어 쓰는 능력이다. 유방은 천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활용할 줄을 알았다.
유방의 말대로 이 셋은 '인걸人傑', 여러 사람 가운데 빼어난 인물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등용하고 이들을 신하로 거느리는 유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천걸天傑, 하늘이 낸 사람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평가는 모두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유방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허풍쟁이 무뢰배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면 한낱 도적의 우두머리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기치 못한 결과는 또 다른 질문을 낳기도 하는 법이다. 유방은 존재만으로 통치자에게 필요한 역량을 되묻게 만든다.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형임에 틀림없다.
<고조본기>는 진한교체기에 등장한 유방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소개한다. 그는 소탈하며 쾌활하고 넉살 좋은 인물이었다. 한편 그는 매우 낙천적인 인물이었다. 단 한 번의 패배로 항우는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유방은 수 없이 패배하고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또 다른 집요함, 끈질김, 불굴의 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최선으로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팽성에서 항우에게 크게 패해 도망치면서 세 차례나 아들과 딸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리기도 했다. 수레가 무거워 빨리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수레를 몰던 하우영은 보다 못해 한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형양의 전투에서는 기신이 유방 흉내를 내어 시간을 끄는 동안 다른 쪽으로 도망쳤다. 부하의 목숨을 이용해 목숨을 건진 것. 그러나 그의 희생에 대한 유방의 반응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희생을 기렸다는 것도, 슬퍼했다는 것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홍문연의 자리를 기억하자. 그는 장수들과 몸을 피하면서 장량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도마 위에 놓인 생선 신세에서 벗어나면서 천연덕스럽게 장량을 남겨놓는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이라 보기도 힘들다. <사기>에서 그는 어떠한 대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의 이런 면모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기와 왕릉의 평가를 보자. 유방은 오만한 사람이다. 툭하면 남을 모욕 주는 사람.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 보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재빨리 인정하고 고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를 반성이라 하지 말자. 그는 반성조차 필요 없는 속내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그의 무서움일 것이다. 자기 것 없이 어느 것이든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 남의 생각을 제 생각으로, 남의 능력을 제 능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 소하나 장량, 한신 등이 그의 아래에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꿈은 유방의 꿈이 되었고, 그들의 욕망은 유방의 욕망이 되었다. 그렇게 꿈과 욕망을 실현하는 집합적 신체. 유방의 단순하면서도 모순적인 면모는 여기에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