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적 영웅의 두 얼굴 6
소하, 장량, 한신 이 셋을 묶어 건한삼걸建漢三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나라를 성립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뜻이다. 고조 유방이 이 셋을 콕 집어 이야기했으니 이들은 개국공신으로 큰 상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아니었다. 전장의 다툼은 궁정의 암투가 되었다. 장소는 달라졌으나 목숨을 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승자를 가리는 싸움이었다면 후자는 승자를 확인하는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소하는 셋 가운데 유방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인물이었다. 고향이 같았으며 유방의 젊은 시절을 지켜본 인물이었다.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날 때 유방을 끌어들여 패공으로 앉힌 것도 소하였다.
훗날 신하들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유방은 소하를 으뜸으로 치켜세운다. 소하가 후방에서 끊임없이 전장으로 병사와 식량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유방이 수차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전장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소하의 지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몸에 상처를 입어가며 전장을 누빈 장수들이 보기에는 영 못마땅한 처사였다. 자신들은 손에 칼을 쥐고 이슬을 맞는 동안 소하는 붓을 쥐고 안락한 집에서 문서를 처리할 뿐 아니었는가.
이에 대한 유방의 비유가 흥미롭다. 여러 장수들이 사냥개라면 소하는 사냥꾼이라는 말이다. 사냥개가 아무리 사나운들 사냥꾼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소하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이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더 섬뜩한 것은 토사구팽兎死狗烹, 사냥이 끝난 사냥개에게는 삶아 죽임 당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소하와 장량은 화를 피할 줄 알았다. 소하는 스스로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장량은 신선을 바라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한신은 달랐다. 흔히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한신이 유방에게 당한 이후 내뱉은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찍이 이 말은 한신의 모사 괴통이 한신에게 충고하며 들려준 말이었다.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이 너무 오래가자 한신에게 사자를 보내 그를 회유한다. 당시 한신은 제왕齊王으로 한왕 유방, 초왕 항우와 버금가는 세력을 가질 정도였다. 이야기인즉 제왕으로 한신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서면 천하가 솥발처럼 안정적으로 나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른바 <사기> 버전의 천하삼분지계!
고대 솥의 발은 셋으로 안정적인 균형을 상징했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것을 잊을 수 없다면 제안을 거부한다. 이때 괴통이 하는 말. '들짐승이 사라지면 사냥개를 삶습니다(野獸已盡而獵狗亨)' 이 말이 한신의 미래가 될 줄이야. 괴통의 말이 맞았다.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만들면 위태롭고, 공적이 천하를 덮으면 상을 줄 수 없다는 말.(勇略震主者身危 功蓋天下者不賞)
결국 훗날 유방은 진평의 꾀를 따라 한신을 사로잡고 그를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시켜 버린다. 이런 까닭에 소하와 장량은 <세가>에 이름을 남겼지만 한신은 <회음후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한신이 했다는 말이 이렇다.
"날랜 토끼가 잡히면 훌륭한 사냥개가 삶기고, 높이 나는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을 치우고, 적국이 사라지면 능력 있는 신하가 죽임 당한다더니.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으니 내가 죽임 당할 차례구나."
狡兔死良狗亨 高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我固當亨
그러나 그의 최후는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여후와 소하의 계책에 빠져 장락궁에서 목숨을 잃는다. 유방은 진희의 반란을 정벌하기 위해 궁을 비운 상황이었다. 대장군 한신. 한때 항우, 유방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인물의 최후라기엔 초라한 죽음이다.
일찍이 육가는 유방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 말 위에서 전장을 누비며 천하를 얻었으나 이제 말에서 내려 천자의 자리에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 이를 항우와 유방의 차이라고 보아도 좋다. 항우는 말 위에서는 천하의 용사였으나 말에서 내릴 줄을 몰랐다. 말에서 내려 죽음을 맞이하는 그를 기억하라. 반대로 유방은 말에서 내려 천하를 도모할 줄을 알았다. 이른바 정치 감각!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것은 보다 고달픈 일이었다.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여전히 말 위에서 각 지역을 누비며 과거의 전우와 싸우어야 했기 때문이다. 항우의 부장이었던 경포를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유방은 자신의 고향인 패현에 들렸다. 옛 친구를 비롯하여 그를 아는 이들이 여전히 그곳에 여럿 살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마음껏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고조는 돌아오는 길에 패현을 지나다 머물렀다. 패현에서 주연을 베풀고 옛 친구와 패현의 어른과 젊은이를 모두 모았다. 패현의 아이 120명을 뽑아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취하자 고조는 축을 연주하며 스스로 시를 지어 불렀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흩날린다.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다.
어디서 맹사猛士를 얻어 사방을 지키리.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鄉
安得猛士兮守四方
오랜 전란에 지친 그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마음껏 즐겼을 테다. 그가 돌아갈 때 패현의 사람들은 모두 성을 비우고 그를 따라나섰다고 말한다. 유방은 사흘을 더 먹고 마시며 즐긴 뒤에야 패현을 떠날 수 있었다.
유방은 경포와의 싸우면서 빗나간 화살을 맞았는데 그것이 덧났다.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자 의원은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방은 도리어 그를 꾸짖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평민으로서 세 척의 칼을 잡고 천하를 취했다. 이것이 천명天命 아니겠느냐? 명命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방은 그 상처가 덧나 죽는다. 이렇게 <사기>를 가로지르는 걸출한 영웅이 세상을 떠난다. 그와 함께 천하의 혼란도 끝난다. 이후 <사기>의 이야기는 궁궐을 주무대로 펼쳐진다. <사기>의 내용은 한참을 이어지지만 앞과 비교할 때 호탕한 맛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진은 서쪽 변경에서 출발했지만 나머지 육국과 천하를 다투었다.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 그는 육국을 정벌한 지배자로, 새롭게 천하를 통일한 통치자로 그 스스로를 내세웠다. 그러나 진이 몰락한 이후 천하의 향배는 전혀 다른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항우도 유방도 이전에 체제를 계승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최후의 승리자가 된 유방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튀어나온 인물이었다.
진시황이 위에서 아래로의 획일화된 지배를 상징한다면 항우와 유방은, 특히 유방은 아래로부터 튀어나온 불특정한 힘의 발현을 대표한다. 유방의 죽음은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하를 뒤흔들 인물이 나올 시대는 끝났다. 창건자의 밑그림 위에 그가 미쳐 다 짜맞추지 못한 조각들을 주워 이어 붙일 이들이 나올 차례다. 이들의 이야기는 건너뛰고 한 번도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던 이들을 만나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