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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29. 2021

가장 치명적인 독

북방의 북소리 중원을 울리다 1

고조 유방 사후, 황제의 제위는 그의 아들 유영劉盈이 잇는다. 시호에 따라 효혜제孝惠帝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한나라가 '효孝'를 숭상하여 시호 앞에 '효'를 붙였으나 보통 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후대의 황제, 효문, 효경, 효무의 경우 '효'를 생략하고 한나라의 황제이니 '한'을 앞에 붙이는 게 통상적이다.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 식으로. 


그러나 한혜제는 영 어색하다. 별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던 까닭이다. 실제로 사마천은 그의 본기를 <사기>에 싣지 않았다. <고조본기>는 <여태후본기>로 이어지며 <효문본기>, <효경본기>, <효무본기>가 그 뒤를 잇는다. 사마천은 효혜제와 그의 아들들, 두 명의 소제少帝 대신 여태후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본디 유방에게는 아들이 여덟이나 있었다. 그의 첫째 아들은 유비劉肥인데, 유방이 정식으로 혼인하기 이전에 낳은 자식이라 적자嫡子는 아니었다. 배다른 형제 가운데 나이는 제일 많았으나 장자 노릇을 하지는 하지는 못했다는 말씀. 


효혜제 유영은 유방과 그의 본부인 여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가 태자가 되어 적통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유방의 장자로 태어나 결코 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영의 어린 시절 아버지 유방은 도적떼의 두목이나 마찬가지여서 집을 비우는 일이 태반이었다. 유방이 생업에 힘쓰지 않아 집안 형편도 어려웠다. 


그것뿐인가. 이후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이후에는 전란에 휩쓸려 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유방이 항우에게 패해 도망칠 때에는 누이 노원공주와 함께 수레에서 내던져지는 일도 있었다. 


여태후의 삶도 여간 고단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여공은 큰 부자였지만 지아비 유방은 한낱 무뢰배에 불과했다. 유방이 항우와 일전을 벌일 때에는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유방의 마음을 빼앗은 척부인이라는 존재였다. 


유방은 관중, 즉 진나라 땅에 들어가 척부인을 새롭게 들인다. 그는 여태후보다 나이가 어렸으며 아름다운 미모로 유방의 마음을 샀다. 유방은 척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여의如意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음먹은 대로'라는 뜻의 이 이름은 유방이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유방은 척부인에게서 얻은 유여의를 태자로 앉힐 궁리를 한다. <여태후본기>에 따르면 그렇지 않아도 유방은 혜제가 못마땅했단다. 소심한 성품에 실망했다나.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야 말로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이라 생각했다. 유방의 마음을 돌린 것은 유후 장량의 활약이었다. 장량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네 명의 현인을 초빙하여 혜제의 후원자가 되게끔 했다. 이를 보고 유방이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이러니 여태후의 입장에서 척부인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여태후는 유방 사후 벼르고 벼르던 일을 시행에 옮긴다. 우선 척부인을 궁에 가두고, 조왕으로 책봉된 유여의를 수도 장안으로 소환한다.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를 모두 해치울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왕 유여의가 장안에 이르기 전 혜제가 몸소 그를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먹고 자며 그를 보호한다.


그러나 황제의 보호도 오래갈 수 없었다. 어느 아침 일찍 혜제가 사냥에 나가고 조왕 유여의가 침상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여태후는 짐독鴆毒을 써서 조왕 유여의를 죽인다. 이어 척부인에게도 복수의 칼을 겨눈다. 팔과 다리를 잘랐으며 두 눈을 파내었고, 두 귀를 불로 지졌으며 약을 먹여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를 돼지우리에 집어넣어 인체人彘, 즉 사람돼지라 불렀다.


그 참혹한 복수도 문제지만 이를 혜제를 불러 이 사람돼지를 보여주었다. 혜제는 큰 소리로 울었고, 병이나 한 해가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여태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사람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겠습니다."


이후 혜제는 주색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았다. 일종의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셈이다. 자신이 아끼던 배다른 동생을 독살하고, 그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의 후궁을 사람돼지로 만든 이 사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여태후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사건은 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유비는 제왕이 되었는데, 장안을 찾아와 혜제와 어울려 술자리를 가졌다. 비록 황제와 제후였지만 배다른 형제인 바, 이들은 형이니 아우니 하며 즐겁게 술자리를 가졌다. 이를 보고 못마땅히 여긴 여태후는 이번에도 짐독을 준비했다. 이를 제왕 유비에게 주었는데, 아들 혜제가 함께 나누어 마시려 하자 여태후는 깜짝 놀라 술잔을 엎어버렸다. 제왕 유비는 노원공주에게 자신의 제나라 땅을 떼어 준 이후에야 장안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혜제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여태후의 손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된다. 혜제 7년 혜제가 세상을 떠나자 이제 본격적인 여씨 천하가 된다. 황제 자리는 혜제의 아들로 추정되는, 그러나 확실하지 않아 훗날 시호도 받지 못한 소제少帝가 잇는다. 황제는 허수아비이며 여태후가 실제 지배자였던 셈이다. 이런 까닭에 사마천은 <여태후본기>에서 혜제 7년, 혜제의 죽음 이후 '고황후 원년'으로 표기한다. 고황후란 고조 유방의 아내 여태후를 가리킨다.


조왕 유여의만 여태후에게 목숨을 잃은 건 아니었다. 유여의 사후 조왕이 된 유방의 여섯째 아들 유우는 굶어 죽는다. 그다음 조왕이 된 일곱째 아들 유회는 독살당한다. 여태후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까? 사마천은 여태후가 매우 강건한 인물로 대신을 죽일 때에도 크게 활약했다고 전한다. 하긴 한신을 죽인 게 바로 여태후 아니었나.


이런 모습 때문에 역사는 줄곧 여태후를 악녀로, 복수와 권력욕에 눈이 먼 인물로 그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마천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별반 남기지 않았다. 여태후의 통치시기 백성들은 평안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궁중의 암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삶은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뜻일까?


여태후에 대해 평가하기 이전에 그를 역사의 주인공을 세운 사마천의 안목에 우선 박수를 보내야겠다. 그가 여태후를 <여태후본기>에 기록한 이후 우리는 새로운 인물을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권력과 복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하나의 인격이라 하자. 여태후는 본격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긴 첫 번째 여인이었다. 


세계의 악녀로 꼽히는 인물 가운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가 있다. 단순한 악녀의 이미지를 벗어나 다른 이미지도 여럿 가지고 있지 않는가? 역사는 늘 공적과 과실로 이야기되는 세계는 아닌 것이다. 참고로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1세기 인물이며, 여태후는 기원전 2세기 말 인물이다. 여태후가 약 150년 정도 앞서는 셈. 


후대의 역사 평가는 유가적 가치관이 주도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여태후는 역사의 반면교사로서만 의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또 얼마나 평면적으로 역사를 읽는 것일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인간 군상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독은 복수의 잔혹함도 아니고, 권력욕의 비정함도 아니라 인간과 인생의 복잡 다양한 면모를 읽어내지 못하는 단순함 아닐까? 사람을 죽이는 독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도 위험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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