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북소리 중원을 울리다 2
여씨천하는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쉬이 무너지고 만다. 고황후 8년 어떤 사건으로 생긴 상처가 도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둘러싼 사마천의 기술은 매우 흥미롭다.
3월 중순, 여태후는 재앙을 씻는 제사를 치렀다. 돌아오는 길에 검푸른 개처럼 생긴 것이 나타나 여태후의 겨드랑이를 물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 점을 쳐보니 조왕 유여의가 재앙을 내리는 것이었다. 결국 여태후는 겨드랑이의 상처로 병이 났다.
<여태후본기>
대관절 이때 나타난 것이 무엇일까? 짐승인지 벌레인지도 채 분명하지 않다. 그냥 우연히 얻은 상처는 아니었을까? 조왕 유여의가 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를 간단히 언급할 뿐 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여태후의 죽음으로 유여의의 원혼이 한恨을 풀었을까? 여태후는 점괘를 보고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거나 후회했을까? 이에 관련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태후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를, 여러 소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확실히 사마천의 역사 기술은 공과功過니 선악善惡이니 하는 식의 단순한 접근과 다르다. 선한 사람이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 식의 세계가 아니다. <백이열전>에서 그가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자. 천도시야비야天道是邪非邪! 무릇 천도天道, 이 세상의 이치란 옳은가 그른가? 이런 구분이나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은 아닐까. 인간사란 이쪽저쪽으로 나눌 수 없이 다양한 모습이 마구 엉켜있는 게 아닌가.
<사기>는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았다. 그는 역사의 인물을 기술하면서 이른바 '위인'이라 불릴만한 인물만 꼽지는 않았다. 도리어 거기에는 위험천만한 인간들이 종종 있다. 여태후 같은 인물을 옆에 두기를 바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인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과거에 분명 존재했던 인간이고 존재할 법한 인간이다. 평가와 무관하게 그런 인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실에 가까운 태도일 테다. 나아가 그런 인간이 바로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사기>는 그렇게 인간사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태후의 죽음 이후, 주발과 진평 등이 활약하여 여씨가 독점하고 있던 군권을 빼앗아온다. 이어 여씨들을 몰살한다. 여씨가 허수아비로 세운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세워야 하는 법. 이때 언급된 것이 대왕代王 유항劉恆이었다. 제왕 유비, 조왕 유여의를 이어 넷째였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에 적절했다. 무엇보다 외척 세력이라고 할만한 게 별로 없었다.
이리하여 효문제 유항이 즉위한다. 문제는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연좌제를 폐지하고 농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조세를 감면했다. 이어 효경제까지 안정적인 치세가 이어진다.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일컬어 문경지치文景之治라 한다.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사자성어로 지금도 쓰인다.
이어 제위에 오른 효무제는 문경지치의 토대 위에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주변 이민족을 정벌하였고 군사적으로도 크게 위용을 떨쳤다. 무엇보다 흉노를 정벌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었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된 것도 무제 시기였다.
사실 <사기>의 기록 가운데 무제시기를 담은 <효무본기>는 논란이 많은 편이다. 사마천의 <태사공자서>에 이르면 <금상본기今上本紀>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효무'라는 시호는 황제 사후에 붙는 시호이기 때문이다. 즉, 사마천이 <사기>를 기술할 때 무제는 생존해 있었으므로 <효무본기>라는 제목이 붙을 수 없다. 내용에서도 의문이 나는 부분이 적지 않아 후대의 위작 혹은 가필된 부분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는 점을 짚어두자.
<사기>는 방대한 내용을 담았지만 정작 사마천 당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술이 부족한 편이다. 무엇보다 사마천 자신이 언제 태어나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언제 <사기>의 탈고를 마쳤는지. 그 이후 사마천의 행적은 어땠는지 별 기록이 없다. 아무리 역사가 해석의 현장이라 한들, 당대의 황제를 평가하고 당대의 통치에 대해 의견을 덧붙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자기 시대를 읽는 것이야 말로 가장 힘든 일 아닌가.
훗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그려볼 때 무제 시기의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적극 수용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제자백가라 불리는 다양한 학파가 존재했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유가가 되었다.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여러 학파의 학문을 폐하고 유가의 학술만 남겨놓으라. 펑유란의 말을 빌리면 '유가독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러 학파 가운에 유가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제국의 통치 철학으로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가는 커다란 제국을 합리적으로 이끌어가기에 적절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백성과 관료, 신하와 황제의 상하 관계를 규정하고 각각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한편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이른바 '중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범위를 확정할 수 있었다. <사기열전> 후반부에는 여러 지명을 제목으로 한 열전이 있다. <흉노열전>이 대표적이며 <남월열전>, <동월열전>, <조선열전>, <서남이열전>, <대원열전> 등이 모두 외부세계, 요즘으로 치면 외국 타문화권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조선열전>에 특히 눈이 간다. 바로 이 땅, 한반도의 과거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상당히 간략하다. 위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 왕이 되었고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는 이야기.
무제 시기는 변방을 인식하며 스스로 중심의 정체성을 다질 수 있었다. 중심과 주변, 문명과 야만, 중화와 오랑캐라는 구분이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즈음하여 형성된 천하 제국의 구상은 약 이천 년 간 큰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중국'이라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자.
한무제는 제국의 황제답게 남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혈마汗血馬, 피땀 흘리는 명마에 빠졌단다. 이에 서역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활약했던 인물이 장건이다. <대원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흉노와 대립하고 있던 월지국과 교류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다. 그러나 중간에 흉노의 포로가 되어 10년 동안 억류된다. 그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흉노에서 탈출하여 월지에 도착하나 월지는 이미 왕이 바뀌어 흉노와 싸울 마음을 접은 상황이었다. 결국 주변국을 돌아다니다 귀국길에 오르는데 아뿔싸!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불굴의 그는 다시 탈출하여 13년 만에 장안에 돌아온다. 여러 서역 국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이런 면에서 장건은 이른바 실크로드를 연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상인은 없는 길도 만들지 않나. 그러나 그 이후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교류가 가능했다. 대규모 흉노 정벌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