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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15. 2021

태산처럼 하해처럼

제국을 열고 만세를 꿈꾸다 2

위기를 기회로! 많이 회자되는 말이지만 정작 실제로 이를 실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역전에는 뭔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진시황본기>에서는 이 축객령 사건이 노애와 여불위 세력을 꺾은 뒤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아니었을지. 


참고로 <진시황본기>에서는 노애와 진시황의 어머니 제태후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시황을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못 박고 있다. 


노애의 반란이 실패하고 여불위도 세력을 잃었다. 여불위의 사람이었던 이사도 결코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사는 명문을 지어 진시황에게 전한다. 


이사가 하는 말은 이렇다. 지금 왕이 누리는 화려한 음악과 보석들은 다 어디에서 왔는가? 이국 땅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이국 땅에서 받아들인 보석으로 궁궐이 가득하고 이국 땅의 음악을 즐기며, 이국 무희들이 왕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은 진나라 사람만 쓴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사람을 뽑아 쓰는 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물의 사람됨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고 굽은지 곧은지를 말하지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빈객이면 내쫓으려 합니다. 그런즉 여색이나 음악이나 주옥은 소중히 여기되 사람은 가벼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에 군림하며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인구가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도 용감하다."라고 합니다. 이에 태산泰山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높아질 수 있고, 하해河海는 작은 물줄기 하나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렇게 깊어질 수 있으며, 왕은 어떠한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으므로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는 사방의 구분이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의 차별이 없으며, 사계절이 조화되어 아름답고, 귀신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이 오제와 삼왕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자칫 왕에 대한 훈계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나 이사는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이사의 말은 가슴 넓게 포용력을 가지라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태산처럼 하해처럼 커다란 존재가 되라는 비전을 설파한다. 


이성규는 <사기>를 번역하면서 '중국 고대 사회의 형성'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사기>를 통해 중국 고대 사회의 형성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좀 넓게 보면 <사기>는 ‘중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사방의 오랑캐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세계의 중심, 문명의 중심을 자처한 ‘중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여기서 이사는 태산太山과 하해河海라는 ‘중국’의 상징물을 내걸고 있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이 상징은 이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사의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이렇다. 새로운 제국을 세우자. 마치 태산처럼 하해처럼 넓고 큰. 그가 주장하는 윤리는 간단하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말 것. 


이사의 글로 왕은 축객령을 거두어들인다. 나아가 이 글을 계기로 이사는 더욱 중용된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다.  


시황 34년의 일이다. 진시황은 제위 26년(BCE 221), 채 마흔이 되지 않는 나이에 천하를 통일했다. 통일 후 8년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통일 왕국의 체제가 잡혔을 무렵이다.


일군의 신하들이 글을 올려 예전 주나라처럼 자제와 공신들에게 땅을 봉하여 달라고 제안한다. 제후국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도 후사를 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에게 따로 자리를 주어 높이지도 않았다. 황제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子弟為匹夫) 황제만이 유일한 통치자였다. 


문제는 과거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강한 권력을 쥔 신하가 나타나면 나라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옛 제도를 본받아 제후를 세우자. 그러나 이사는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옛날에는 천하가 흩어지고 어지러워도 아무도 이를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나란히 일어났고, 말하는 것마다 옛것을 끌어내어 지금의 것을 해롭게 하고, 헛된 말을 꾸며서 실제를 어지럽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운 것을 옳다고 여기고 조정에서 세운 제도를 비난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려 천하에 오직 황제 한 분만이 있도록 정했습니다. 그런데 사사로이 학문하는 자들은 서로 모여 이미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허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칙이 내려졌다는 말을 들으면 각자 자기가 배운 학설에 근거하여 그것을 비판하고, 집으로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헐뜯고 밖으로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논의합니다. 그들은 군주를 비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고,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당파가 이루어질 테니 금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청컨대 모든 문학과 <시>, <서>, 제자백가의 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것을 없애도록 하고 이 금지령을 내린 지 30일이 지나도 없애진 않는 자는 이마에 먹물을 들이는 형벌을 가하여 성단(4년 동안 새벽부터 일어나 성 쌓는 일을 하는 죄수)으로 삼으십시오. 의약, 점복, 농사, 원예에 관한 책은 없애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배우고 싶은 자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으면 됩니다." 


이사는 과거의 혼란이 봉건제도, 즉 제후를 세웠기 때문이라 말한다.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기에 그토록 전란이 끊이지 않았는가. 게다가 다양한 학설과 주장이 일어나 크게 어지럽지 않았는가. 지금은 황제 한 분이 있는 법! 따라서 그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 길에서 이야기하고 사사로이 책을 읽으며 논하는 것까지.


이사는 황제 한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사상도 나라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자백가의 책을 태울 것을 주장한다. 이른바 분서焚書 사건의 시초이다. 훗날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이야기되는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갱유’, 즉 유학자들을 파묻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진시황본기>에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 진시황은 신선이 되는 길을 찾기 위해 여러 방사方士(도사)를 곁에 두었는데 이들은 진시황을 속여 사사로이 많은 재물을 축적했다. 이를 알고는 그에 연관된 자들을 심문하여 처단하도록 명령했다. 원문에 따르면 제생諸生 460여 명이 이에 연루되어 이들이 모두 수도 함양 근처에 매장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밖에 여러 사람에게 변경으로 내쫓았다.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


고대에 ‘분서갱유’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강력한 사상 통제 정책이 실제로 있었을까? <사기>는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한편 이 사건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유가를 대상으로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분서갱유’의 이미지는 진시황을 적대시했던 유가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였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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