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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인 Aug 02. 2023

퇴직 후 이튿날, 뾰로통한 마음에 시달리다.

네. 이것은 일기입니다.

 

퇴직 후 이튿날. 어제에 이어 뾰로통한 마음에 시달린다. 뇌는 반쯤 잠들어 있는데 모든 신경이 삐쭉삐쭉 서 있다. 보통은 본인의 마음 상태와 내밀한 원인까지 잘 파악하는 편인데, 도통 어제오늘의 신경질과 짜증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모르겠다. 원인을 모르기에 내심 더 신경 쓰인다. 퇴직 후 삶의 변화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일까? 어렴풋이 더듬더듬 답을 헤매어본다. 제2의 인생은 작가로 살기로 했으니까 어제도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오늘은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 이대로면 글에 짜증이 묻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풀어내는 글이 좋은 글인가?’를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 이름이 떠올랐다. 글 속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 어떤 때는 감정묘사를 통해 누군가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에세이나 소설의 경우 인물이 처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감정이 쓰여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유도 모르는 짜증을 담아 쓴 글은 독자를 감정쓰레기통으로 만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래, <기분이 글이 되지 않게> 하자.


나는 세 살 아이가 아니니까. 스스로를 토닥여 보기로 한다. ‘뭐가 불편하니?’ 스스로 질문하며 몸부터 편하게 달래 본다.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잔잔한 음악을 선곡해 보고, 에어컨의 온도를 높여본다. 혹시 지금 마시는 얼음 꽉 찬 콜드브루가 문제일까? 최애 오설록 삼다 꿀배티를 따뜻하게 우려 위장을 포근하게 해 본다. 창문을 열어 환기도 해보고. 아, 막상 창문을 여니 더운 여름날의 매미울음소리가 방에 와 가득 맺힌다.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파도소리 같은 매미소리와 바깥 소음이 은근히 정겹다. 그 리듬감에 조금씩 몸을 실어보니 긴장이 하나씩 풀린다. 자연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다.


한숨을 돌린 후,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 스스로 되물어본다. 퇴직 후 나의 내밀한 마음을 들여다본다.


첫째, 성인이 된 이후 무소속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처음이기에 불안하다.

여태 타이틀 좋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그 타이틀의 콩고물을 받아먹는 삶을 살아왔다. 이제 프리랜서로 첫 발을 내디딘 나로서는 어떠한 타이틀도 없이 누군가에게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해야 한다는 것이 내심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전에는 학교가 어딘지, 회사가 어딘지 내 소속처를 답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왜 작가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 어떤 수익구조가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심 불안함이 서린다. 상대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비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안감. 어떻게 나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


둘째, 글쓰기와 책 읽기에만 깊게 몰두하고 싶은데 방해받는 일들이 많다.

작가로 살기로 결정한 후, 글쓰기와 책 읽기에 더욱 정진하고 싶어졌다. 감사한 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작가로 이틀을 살아보니, 일상이라는 방해물이 있었다. 나는 회사를 가지 않으면 온전히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졌었나보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읽고 싶을 때 충분히 읽을 수 있는 하루. 하지만 회사를 가지 않고 맞이한 이틀은 그렇지 않았다. 난 여전히 약속 시간에 맞춰 친구를 만나야 하고, 반찬을 보냈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고 택배를 챙겨 넣어야 했고, 공모주 청약을 하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아 30분씩 끙끙거리며 돈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OTP카드를 눌러 청약해야 했다. 함께할 사람들이 있는 것 나를 먼저 챙겨주는 부모님이 계신 것 모두 사랑받는 일이라 참 감사하다. 하지만 감사의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을 받아 내심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생각해 보니 퇴사를 한다고 해서 일상에서 해야 할 것들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이제야 퇴사 후 삶을 직접 겪으며 자각한다.


셋째, 직장이 없어졌다고 해서 타인이 내 시간을 마구 침범해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지는 않을까 하는 앞선 걱정이다.

사실 회사를 다닐 때도 나는 외근직이었기 때문에 9시-6시로 일 해야 하지는 않았다. 유동성 있는 working time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사를 다닌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9 to 6로 일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연락을 할 때면 ‘이 사람이 일을 하고 있겠다.’라는 배경을 갖고 ‘바쁘시죠? 일 중이시죠?’라는 태도로 나를 대한다. 직장인 일 때는 누군가 내게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묻거나, 연락이 오면 ‘지금 일하고 있어서 나중에 연락할게.’ 라거나 ‘회사일정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 라거나 회사 핑계를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 일하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혹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할 때 ‘모든 시간이 열려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앞선 불안감이 든다. 내게도 글 쓰고 책 읽을 시간. 나만의 시간은 굉장히 중요한데 직장인이 아니면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 아직은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괜히 나도 모르는 새 고슴도치처럼 삐쭉 날을 세우며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거든? 내 시간을 침해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고!’라고 마음속의 내가 주야장천 외쳐댄다.


넷째, 나의 조급함과 욕심 때문이다.

회사를 퇴사하고 사실은 정리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했던 일들 정리하기, 준비하던 대학원에 대한 세부정보 탐색, 집 청소, 글쓰기와 관련된 SNS 디자인 세팅, <권예인사무실>의 간판, 개인명함 제작, 가족 가계부 정리 등등…. 하지만 막상 퇴사 후 맞이한 이틀은 그것들을 여유롭게 해낼 체력과 시간이 없어 글만 쓰다 끝이 났다. 머릿속에서 ‘그것들 정리해야 하는데.’라는 의무감이 들지만, 한쪽에서는 ‘나는 이제 작가니까 무조건 글이 최우선이야.’라는 마음이 충돌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내 꿈이 어영부영되어버릴까 봐 불안함에 무언가 자꾸만 쓴다. 뒤로 밀린 정리해야 할 것들은 짐이 되어 마음 중앙을 지그시 누르기 시작한다. 아직 퇴사하고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이 너무 급하고 욕심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괜찮아. 지금 잘하고 있어. 물리적인 시간으로도 그것들을 다 할 수는 없었단다. 차근히 하나씩 해 보자. 한 달이 걸려도 두 달이 걸려도 괜찮아. 너는 작가의 하루를 글을 쓰며 충실히 보내고 있잖아. 그거면 됐어.’ 나를 토닥여 본다. 생각해 보니 회사생활을 할 때 보다, 오히려 작가로 집필 작업을 할 때가 더 많은 시간이 든다. 그러니 작가로 산 이틀간 잡다한 것들을 정리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제야 현실과 내 마음을 이해하고선 토닥토닥 나를 감싸준다.


큰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뱉어본다. 조금만 긴장을 풀자. 아직 퇴사하고 이틀밖에 되지 않았잖아.

괜찮아.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이미 잘하고 있다고. 


-2023/08/02

GWON Y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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