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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어린 로레인 Jun 02. 2022

아이와 아무 버스나 타고 여행을 떠났다



주말의 끝자락, 일요일 오후 4시.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보통이면 공원을 찾는 시간이지만 아이들과 셋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을 보내며 지친 아이들은 그저 인형과 베개로 얼굴을 비비며 낮잠에 들기 직전이었다.


순간 오랜만에 한가로운 주말 황금 같은, 이 시간을 낮잠으로 보내기가 아쉬워졌다. 뭔가 새로운 재미를 주고 싶었다. 평소 가는 공원이나 놀이터 말고.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우리 버스 여행 떠날까?"


아이들은 엄마의 제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것은 어린 자신들에게 좀 더 자란 어린이로서 할 수 있는 우월한 마음이 드는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무모한 조건을 더했다.


"우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오는 버스 타자"


아이들은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들뜬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침대를 박차고 외출 준비를 했다. 물병을 챙기고, 선글라스와 모자까지!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몇 정거장 가서 내리는 게 좋을까?"


큰 아이는 7, 작은 아이는 6을 외쳤다. 그래서 두 아이의 바람을 모아 13 정류장이 지난 뒤에 내리겠다고 정했다. 버스정류장에 다다를 무렵 운명처럼 우리를 태우고 즉흥 여행을 함께할 파란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 올랐고 아이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름날의 늦은 오후, 뜨거운 햇살이 창을 통과해 아이들의 얼굴을 비췄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무장한 아이들에겐 그 눈부심마저 비장하게 느껴졌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노선도를 보며 13을 세어보았다. 다행히 잘 아는 시청 주변이었다.


"엄마는 거기에 뭐가 있는지 검색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직접 가서 놀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자"


사전에 검색해서 가는 것이 아닌 일일이 발걸음 해서 근처에 뭐가 있는지 찾아가는 수고가 필요했지만, 핸드폰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아이들과 태평스럽게 창밖을 구경했다. 흔들리는 버스에 긴장이 풀리는지 아이들은 살짝 낮잠이 들었다. 순간 나는 이렇게 여행을 떠나도 되나? 두 아이 모두 잠이 든 상황을... 혼자 감당하려니 당혹스러웠지만 내리기 전에 잘 깨워보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단잠에서 잘 깨 주었고, 우리는 시청역 입구에 내렸다. 시민청은 일요일이 쉬는 날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평소였으면 아이들의 불만이 터질 법도 한데, 미리 알아보고 준비해오지 않은 즉흥여행이라는 공감대가 아이들에게도 통했는지 아쉽지만 당연히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죠, 다른 곳으로 가요"


서둘러 우리는 서울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책을 읽기보다 우리 집 근처 도서관과 다른 점을 찾고, 건물의 역사를 전시해놓은 곳을 구경하고, 스카이라운지에서 드넓게 펼쳐진 시청광장을 감상했다. 미리 챙겨 온 물을 마시며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탐험하는 여행자로서 감회를 나눴다.


"엄마, 또 새로운 곳 가요"


이제 우리는 근처 덕수궁으로 향했다. 고종 황제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남편과 데이트로 즐겼던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상황으로 마주하니 새로웠다. 티켓을 끊는데, 다둥이카드가 있다면 무료라고 일러주셨다. 다음엔 그런 것도 챙겨야겠군. 노하우를 얻고 입구로 들어갔다.

신나게 달려 다니는 아이들을 쫓느라 이 넓은 곳을 언제 본담? 걱정이 무색했다. 금세 분수까지 점령한 아이들은 이곳저곳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며 거침없이 질문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서서히 배고픔을 외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덕수궁 돌담길 국숫집으로 향했다. 돌담길을 데이트하던 때가 떠올랐지만, 그때의 시간이 잔상으로 남았을 뿐, 지금의 현실은 더 다이내믹한 아이들과 함께다. 국수를 먹고 옆집에 인기 있어 보이는 와플도 시켰다.


시청 광장이 지금 잔디를 기르는 중이라 출입이 어려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벤치 대신 그 옆 길가에 한가로이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달콤한 메이플 시럽이 뿌려진 와플과 초코 와플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오늘 즉흥 여행은 성공이구나, 싶다.

처음 내린 정류장 건너편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며 우리는 인상적인 여행을 재잘재잘 되새겼다. 이번 여행을 떠나며 그사이 아이들이 더 자랐구나 확인했다.


무엇보다 어른의 일방적인 계획이 아닌 자유로운 판 속에서 아이들은 주도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선보였다. 길을 찾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면서 아이는 침착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듯했다. 이렇게 자기 몫을 해내고 동생까지 잘 돌보는 첫째도 기특하고, 힘들지만 부지런히 엄마 형아 따라다니며 애교를 선사하는 둘째도 기특하고...


아들들, 다음 여행은 아빠랑 셋이 가보렴~ 초록버스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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