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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Nov 21. 2024

#94. 1947. 1916. 1708

101번 글쓰기

천왕봉에 가기로 한 건 대학 동기의 제안 때문이었다. 함께 청계산이며 남한산성을 다니던 친구였다. 서울 근교의 산들로는 점점 물릴 때쯤, 조금 더 높은 산을 가보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높은 산이라면 험하기도 하고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골라본 곳이 지리산이었다. 처음엔 2박 3일 트래킹을 계획했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는 몸으로 2박 3일의 산행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쉬기 위해 내는 휴가도 아까운 판에 고된 산행을 위해 2박 3일을 투자한다는 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도 얄팍하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동기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안을 찾기로 했다.



무박 2일 천왕봉

고민 끝에 접근성이 가장 좋은 무박 2일 코스를 선택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새벽 4시 백무동에 도착. 정오에는 천왕봉 정상에 서고, 오후 4시에 중산리로 하산. 그리고 밤 8시엔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총 20시간이 걸렸다.


나는 잠이 많진 않지만 밤을 새는 건 서툴다. 학생 때 공모전을 준비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회사에서도 경쟁 PT 준비 때문에 몇 번이나 철야를 했지만, 완전히 밤을 꼬박 샌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새벽 산행을 감히 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졸음에 걸음이 비틀거리다 사고라도 날까 봐 두려웠다. 막상 산행을 시작하니 그런 두려움은 기우였다.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지해 걸을 때는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갔다. 차라리 너무 추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두운 숲길에서 나 자신만을 믿고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묘한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졸음 걱정은 잊은 지 오래였다.


버스를 타고 출발할 때부터 분위기는 달랐다. 사람들 대부분이 등산복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딱 봐도 산객이었다. 백무동에 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등산객들로 가득했는데, 한꺼번에 몰려드는 모습은 마치 신병교육대의 야간 행군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하지만 산행이 시작되자 하나둘 앞질러 나갔다. 짐이 가벼웠던 덕도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찌나 가방이 큰지, 산 속을 작은 집 하나씩 짊어진 듯 보였다.


장터목 대피소에 다다랐을 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떤 무리는 삼겹살을 굽고 있었고, 어떤 이는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먹을 것을 잔뜩 챙겨온 사람들. 정말 산행 자체보다 식사가 더 중요해 보였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의문도 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행

지리산은 내가 가봤던 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청계산이나 관악산의 엉성한 오르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파르고 길었다. 오를 만큼 올랐나 싶을 때 또다시 앞에 경사가 나타났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6시 무렵, 동이 트면서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뭇잎은 어느 초록보다 더 초록빛이었고, 계곡물은 어떤 물보다도 맑았다. 그렇게 선물처럼 나타나는 풍경들 덕에 힘든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두 번 다시는 이 길을 오르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산행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들은 대개 정상에 올랐을 때라 말하지만, 내게는 아니다. 평지에 발을 디딜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내려 가야 할 일이 쌓였다는 것이고, 산행을 시작하는 것은 사건사고가 생길 확률이 99%이기 때문이다. 산이란 곳은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사건사고가 생길 수 있는 불확실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을 무사하게 다녀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을 오르는 행위가 성취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천왕봉 정상에서는 간단히 사진을 찍었다. 줄이 길어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사진을 찍는 것도 귀찮았다. 그저 기록만 남기고 싶었다. 누군가는 유튜브 방송을 켜기도 하고, 멋진 포즈를 취하기도 했지만 나는 얼른 내려가고 싶었다. 내려가 막걸리를 마시는 상상만으로도 힘이 났다. 하산은 언제나 더 빠르고 가벼웠다.



20시간의 여정

무박 2일의 산행이 끝났을 때, 몸은 만신창이였다. 온몸에서 땀 냄새가 배어나왔고, 땀에 절은 얼굴에서는 짠내가 풍겼다. 하지만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등산화와 양말부터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직행했다. 뜨거운 물을 정수리부터 끼얹으며 찌든 피로를 씻어냈다. 뜨거운 물이 어깨와 등, 온몸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기분이 조금씩 풀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그제야 비로소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고단하고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렇게 천왕봉 산행은 막을 내렸다.


시간은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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