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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Jul 25. 2018

나의 바닥을 보이는 사랑

나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랑해주길

연애할 때 밑바닥을 보이면 안 되는 걸까? 밑바닥을 드러내며 시작한 연애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너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밑바닥밖에 없었다. 실연은 인간을 황폐화시키기 마련이다. 감정 조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 멀쩡한 얼굴로 낮 시간을 보내는 것만 해도 지쳤다. 속에서는 분노와 비통함, 그리움과 짜증이 들끓었다. 좋은 것이라고는 남지 않은 마음의 바닥에 나는 주저앉아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연애를 시작하면 안됐다. 어쩌다 시작된 너와의 연애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바닥밖에 남지 않은 내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것. 받아들이거나 떠나거나. 데이트 할 때마다 전 연인이 생각나 서럽게 우는 사람이 싫다면, 그때의 나와는 사귈 수 없는 사람인 것이었다.  


이별은 마치 이사와 비슷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떠난 자리에는 외면하고 싶어 밀어두었던 나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엉켜있었다. 연애를 할 때 ‘실제의 나’를 잊고 ‘연애하는 나’에 몰두할 수 있는 게 좋았다. 화나면 눈깔 뒤집혀 쌍욕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연애할 때는 참을 인 백 개를 삼키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사실은 의지하고 싶었는데, 그대신 믿음직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3년을 사귀고도 나와의 미래는 모르겠다고, 감정은 강요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대를 존중하려 이를 악물고 애를 썼다. 상대의 부족함을 탓하는 대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탓했다. 친구들은 내가 죽으면 사리가 나올 거라고 말해줬다. 예쁘게 표현하자면 “너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였다. 그러나 한 번의 연애로 근본부터 좋은 사람으로 변화하기는 어려웠다. 좋은 연인으로 보이기 위해 편집되고 생략된 나의 일부는 마음 한 켠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진짜 나의 모습은 숨기고 싶었다. 상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바닥부터 못난 나의 모습을 그 누가 아닌 나에게 제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수업에 지각하면 울면서 뛰어가는 내가 부끄러웠다. 작은 일에도 불안에 떨고, 늘 과민해서는 설사를 달고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성질머리가 온순 할 리도 없었다. 개처럼 싸우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의 별명은 늑대새끼였다. 내 분을 못 이길 때면 혼자 방바닥에 주저앉아 짐승 소리를 내며 울었다. 노란 장판에 눈물 콧물이 뚝뚝 떨어졌다. 외로웠다. 늘 외로웠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스팸문자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외로웠다. 외로운 게 부끄러워 외롭다 말도 못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고 괜찮다고 안아주길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존적인 내 모습이 싫었다. 나는 나의 일부를 너무 미워해서 감히 누군가에게 사랑해달라고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  


 너에게도 꺼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망할 놈의 실연이 나의 마음을 깨부숴버려서 감출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새벽에 엄마한테 악에 받쳐 쇳소리를 지르는 걸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듣게 했던 것도, 논문 수정 제출 기한을 너무 늦게 확인하고 패닉해서는 소파에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도, 연락이 안되면 화가 나서 부재중 전화를 몇 십 통씩 남겼던 것도. 숨길 여력만 있다면 숨겼을 것이다. 전연인은 책과 공연을 좋아했는데, 너는 왜 취향이 없느냐며 짜증냈던 내 모습이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화가 나면 전화를 끊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리는 것도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남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길가에서 소리지르며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너에 대한 죄책감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오래 숨죽여왔던 나의 일부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떠날 테면 떠나” 하지만, “제발 이대로의 나를 사랑해줘”  


 최악의 나를 사랑해달라는 건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나를 좋아하는 너를 택했다. 내가 덜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를 보여주는 게 덜 부끄러울 거 같았다. 나에게 목을 매는 너라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받아주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받아주지 않더라도 덜 상처 받을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너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주길 바랐다. 사람 마음이 이토록 뻔하고 간사했다.    


 네가 왜 그때 나와 헤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고백한 것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 이런 엉망인 애를 두고 떠나면 나쁜 사람이 될 거 같다는 죄책감이었을까? ‘설마 얘가 계속 이러지는 않겠지?’라는 희망이 있어서였을까? 너는 내 온갖 꼬라지를 보고도 내 옆에 있었다. 때로는 상처 받고, 자주 당황하면서도 어쨌든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짐승처럼 울 때면 너는 나를 몇 번이고 꽉 안아주었다. 울음이 그치면 우리는 함께 쪼그려 앉아 나의 바닥을 토닥였다. 그렇게 진흙탕처럼 질척이던 나의 바닥은 조금씩 단단하게 굳었다. 

  

 사랑하면서 우리는 결국 바닥을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장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내 바닥을 인정해줬을 때 나는 너를 내 마음 안으로 다 들여놓을 수 있었다. 내가 너의 바닥을 쓸어보았을 때 비로소 내가 사랑하는 네가 누구인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사랑은 허공에 떠있지 않았다. 서로의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는 관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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