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종일 Oct 27. 2024

역사는 흐른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잔재를 왜 그대로 두었을까

살아남은 역사


그랩을 불렀다. 목적지는 사이공 시티 투어버스가 출발한다는 '사이공 중앙 우체국'.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여행 책에 등장하는 1 군내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그랩을 타고 15분이면 갈 수 있다. 


사이공 중앙 우체국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했던 19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사이공 중앙 우체국은 베트남 통일궁과 호치민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호치민 1군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우체국에서 둘러본 주변 건물들은 이곳이 베트남인지 프랑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여기가 중앙 우체국인가 봐. 1891년부터 지금까지 100년 넘게 진짜 우체국으로 쓰고 있대요. 건물 멋있네"

"파리 중심지랑 거의 똑같네. 1군, 2군 지역 나눠 놓은 것도 그렇고, 건축해 놓은 것도 그렇고. 19세기에 프랑스가 여기 사이공을 지배했거든. 그때 다 지은 거 아니니 이 건물들이. 도로들도 그렇고 느낌이 딱 파리다."

파리 시내를 한 달 가까이 걸어 여행 다녀 본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똑같아요? 그래도 다른 건 없어요?"

"똑같아. 거의 똑같아. 저층으로 지어 놓고 화려하게 생긴 건물 모양도 거의 비슷허고, 중앙에 로터리가 있는 것도 그렇고. 식민지배 할 때 프랑스에서 사람들 건너와서 파리랑 똑같이 만들려고 했겠지."


하긴 호치민 한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것도 그렇고, 광장 이름이 '파리 코뮌 광장'인 것도 그렇고 이름부터 프랑스 냄새가 진하다. 베트남은 왜 프랑스 이름을 그대로 남겨 두었을까 궁금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독립이 되자마자 이름부터 바꿨을 텐데. 아마 진작에 '사이공 응우옌 대성당', '베트남 인민 광장'으로 바꿔 불렀을 거다. 아니, 이 건물들은 모두 '치욕의 잔재'로 다 철거했을지 모르겠다.

사이공 중앙 우체국의 안팎


1995년 국민학교 5학년이던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전 견학 다녀왔던 멋있게 생긴 박물관이 사실은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이던 일제의 잔재였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억누르기 위해 경복궁을 가리는 형태로 지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TV에서 첨탑을 해체하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봤다. 어린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일제의 잔재라는데 당연히 부숴야지. 그런데 그 많은 박물관 물건을 어디로 옮기나' 정도로 생각했을 거다.


1년 넘게 지속된 미스터 사이공의 베트남 연구에 '프랑스 식민 지배와 베트남 사람들의 민족의식'에 대한 내용이 없을 리 없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걸 다 보전해 놓잖아. 무서운 사람들이야 정말. 베트남은 우리가 다 이겼다는 자부심이 있어. 프랑스 이겼지. 미국 이겼지. 중국도 이겼지. 세계 강대국 중에 베트남한테 혼나지 않은 나라가 없지. '어차피 다 우리가 이긴 나라들인데 신경 안 써도 된다. 앞으로도 이긴다. 우리는 자신 있다' 이런 식이지. 식민지 때 건물이라고 다 부수는 건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베트남 사람들은 '건물 그거 그냥 놔둬라. 어차피 우리가 프랑스 이기고 쫓아냈는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 건물들이 얼마나 멋있니 또. 베트남이랑 유럽이랑 퓨전이 되니까 관광 온 사람들도 볼게 많잖아. 똑똑한 사람들이라니까."

"역시 아버지 연구가 깊네요. 깊어. 베트남 사람들이 똑똑해서 호치민에 리틀 파리가 남아 있다는 거구만. "

"그렇지. 아주 실용주의야. 한국이 베트남전 참전한 거 사과한다고 하니까 그러잖아. '한국?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냥 기업들 들어와서 투자해라. 우리가 잘해줄게' 그렇게 한다니까. 미국도 이용하고 중국도 이용하고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러다 조금 더 잘 살게 되면 그때는 또다시 협상하자고 할걸."


아버지의 연구는 방대하지만 명료하다. 아버지는 베트남을 연구 대상으로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실용주의와 자부심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했던 우리는 이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우리는 폭파의 카타르시스를 얻었지만,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심장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는 잃었다. 이제 그 역사는 인터넷에서 찾아봐야만 한다. 청사 지하에 고문실이 있었느니, 건물의 모양이 일본을 상징하는 날일자(日) 모양이니 하는 것들은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조선총독부 청사에 견학 갈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이제 초등학생인 아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이전 12화 꼰대는 나이순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