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블랙팬서
살짝 열어 둔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핸드폰을 보니 7시였다. '한국 시간인가? 한국이 베트남보다 두 시간 빠르니까 베트남은 새벽 5시네. 좀 더 자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떤선녓 공항에서 200,000동 주고 산 베트남 유심이 잘 작동되었으니, 베트남 시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침 7시. 어떻게 떠나온 여행인데 더 자면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간밤에 푹 잤는지 몸은 가뿐했다. 아버지는 싱글 침대를, 나와 아들은 싱글을 두 개 붙여 만든 큰 침대를 썼다. 높은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는 아들이 굴러 떨어질까 봐 베개로 침대 끝을 막아줬는데 다행히 아들은 아침까지 침대 위에 있었다.
커튼을 걷으니 햇살이 쏟아졌다. 미스터 사이공은 벌써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쳤다. 검은색 카라 티셔츠에 검은색 긴 면바지. '이 분이 동남아시아로 여행 온 것 맞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의생활은 한결같다. 무채색이어야 한다. 검은색과 흰색 물감을 비율만 다르게 섞는다. 마치 우리나라 도로의 자동차 색 같다. 1위는 흰색, 2위는 검은색, 3위는 쥐색. 옛날 사람들은 진한 회색을 '쥐색'이라고 불렀다. 요즘에는 쥐색을 '플래티늄 그라파이트'니 '녹턴 그레이'니 하는데 들어도 무슨 색인지 모르는 이름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버지의 첫 차도 쥐색 르망이었다.
아들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침 인사도 없이 중얼댔다.
"조식... 빨리 먹을래요."
아들은 잠들기 전부터 조식을 기대하더니 일어나자마자 조식을 찾았다. 아들에게 조식은 '맛있는 것을 다 먹을 수 있는 곳'의 대명사다. 어른들이야 '여기 조식이 괜찮네, 별로네' 하지, 아이들은 그저 '조식'이면 최고의 식사다. 어떤 급의 호텔 조식이든 소시지와 계란은 있다. 빵도 있고 주스도 있다. 운이 좋으면 초콜릿이 발려있는 디저트도 있다. 아이들은 그거면 대만족이다.
"그럼 바로 조식 먹으러 갈까? 'M' 층으로 가면 되잖아."
"아빠 그전에 머리에 물 좀 묻혀 주세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아들은 밤새 붕 뜬 머리에 물을 묻히고 나간다. 어린이집 다닐 때와 비교해 큰 변화다. 친구들에게 아무렇게나 뜬 머리를 보여주기 싫을 만큼 아들은 자라 있다.
"아들, 그런데 여기 어딘지 알아?"
"음... 베트남이잖아요. 몰라요?"
우리가 여행 중임을 상기시키고 오늘 하루를 기대하게 만들 의도를 가지고 내가 아들에게 물었다. 이 질문을 하면 '아하, 우리 베트남에 왔죠? 신난다. 재밌겠다.'라면서 방방 뛸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들이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빠는 그것도 모르냐는 질문이 되돌아올 뿐. '그래, 뭐 베트남 맞지...' 머쓱했다.
"아무튼 아빠는 엄청 신난다. 할아버지도 신난 것 같아. 벌써 옷을 다 입으셨거든."
나는 아버지의 기분도 멋대로 추측했다.
에덴스타 사이공 호텔은 조식이 맛있다는 평이 많았다. 아직 7시 30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음식의 종류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모든 음식이 신선하고 깔끔했다. 첫날부터 베트남어만 통하는 찐 로컬 식당에 도전하느라 알게 모르게 쌓인 긴장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아침 한 끼는 편안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겠군.'
아들은 다양한 소시지와 햄을 보고 이미 별 5개를 주었다. 아버지는 따로 마련되어 있는 쌀국수 코너를 개척했다. 아버지는 면을 사랑한다. 다행히 에덴의 쌀국수는 꽤 훌륭했다. 적어도 호텔 조식의 구색 맞추기는 아니었다. 적당히 진하고 시원한 국물에 적지 않은 고기가 부드럽게 익어 있는 소고기 쌀국수였다. 아버지도 연신 '아주 좋다'를 반복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베트남 쌀국수는 한국에서 많이 먹는 '퍼(Pho)' 외에도 '분 보 후에(Bun Bo Hue)'니, '후 띠유(Hu Tieu)'니 종류가 많다고 했다. 삼부자 원정대의 음식 담당으로서 아버지가 모든 종류의 쌀국수를 섭렵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만족스러운 조식을 먹고, 방으로 올라온 삼부자는 나갈 채비를 했다. 사실 우리에게 특별히 짜둔 동선은 없었다. 베트남에 대한 공부라면 아버지가 1년을 넘게 했지만, 여행 동선을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여행의 대장인 아버지에겐 이번 삼부자 여행은 '첫 번째 베트남 탐사'일뿐이었다. 따라서 여행 이후에 베트남이 더 좋아질 수 있을만한 몇 가지 컨셉이 정해져 있을 뿐이었다.
베트남의 사회와 경제를 최대한 '생생하게' 느끼자.
온 김에 다 볼 필요 없다. '다음에 또 올 이유'를 만들자.
노인과 아이의 체력을 생각해 '힘들면 쉬자.'
우리는 '오늘 뭐 하지'를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아빠, 우리 이제 어디 가요?"
"그러게. 아버지, 우리 진짜 계획이 없네요. 일단 나갈까요?"
"여행책 보니까 박물관도 많고 갈 데는 많더라."
"그러니까 많긴 많은데 동선이 하나도 없잖아요. 여기도 시티 투어 버스 있던데 그거부터 탈까요? 왜 명동에 보면 관광객들 타는 것 있잖아요. 빨간 버스"
"아빠, 그거 2층 버스 맞죠? 어제 호텔로 올 때 봤어요. 그거 타요."
2층 버스는 어린이가 즉시 반응하는 훌륭한 아이템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놀이 중 '제일 먼저 오는 2층 버스 아무거나 타기 놀이'가 있다. 육아 휴직은 참 좋은 것이다. 이런 쓰잘머리 없는 놀이에 하루를 써도 뿌듯하다. 강남에서 동탄까지 1시간 내에 주파하는 버스를 탔더랬다. 당연히 2층 제일 앞자리에 탔다. 덕분에 연고도 없는 동탄에서 닭강정 맛을 봤다.
생각해 보니 나도 아들만 할 땐 2층 버스를 갈구했었다. 30년쯤 되었을까. 가족과 함께 서울랜드를 갔다. 서울랜드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코끼리 열차'라는 셔틀을 타야 했다. 나는 코끼리 열차 말고 다른 걸 타야겠다며 긴 줄을 섰다. 새로 생긴 2층 짜리 '킹콩 버스'를 꼭 타보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사이공 시티 투어버스는 1군 지역의 웬만한 관광지들을 거쳐 간다. 일단 하늘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2층 버스 위에 앉아 시내를 한 바퀴를 돌면 시내의 명소와 지리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호치민의 주요 거리를 지도를 보며 천천히 지나치다 보면 분명히 가보고 싶은 곳이 보일 것이다. 기가 막힌 전략이었다.
'오늘 뭐 하지' 조차 계획이 없다면, 오늘 뭐 할지 가늠할 수 있는 활동을 먼저 하면 된다. 우리에겐 사이공 시티 투어버스가 해답이었다. 본인의 MBTI가 'P'다? 시티 투어버스를 먼저 타시라.
호텔방을 나서려다 위, 아래를 시커먼 쥐색으로 맞춰 입은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그런데 옷이 이게 뭐예요. 더워요. 시원하게 입읍시다. 이 옷 이거 밝은 거랑, 반바지랑 샌들 신으세요. 아따 여행을 왔으면 현지 스타일로 합시다. 제발! 좀!"
보기만 해도 더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아버지에게 부드럽게 말하기'가 올해 나의 목표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나는 효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불효자도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버지에게 나가는 내 말투가 퉁명스럽다. 불친절하고 안 예쁘다. 나는 왜 아버지에게 좀 더 따뜻하게 말하지 못할까. 어차피 70년이 넘은 취향은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말이라도 강하게 하려는 것일까. 배려 천재 우리 아버지라면 어차피 순순히 들어 주실테니 점점 더 툴툴대는 건 아닐까.
순간, '아들이 30년 후에 나에게 이렇게 다그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옆에서 보고 있었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아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30년 후 발현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 노인'이 되면 생각만큼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아질 텐데.
후회가 됐다. 베트남까지 와서 아버지께 이래야만 하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를 가르치려 드는 아들이라. 이런 불효를 해야 하나 싶었다. 게다가 옷 입는 거야 취향인 건데. 취향존중, 줄여서 취존. 요새 말을 알기만 하면 뭐 하나. 40살 꼰대가 72살 젊은이에게 옷 좀 똑바로 입으라고 한 거나 다름없었다. 꼰대 플러스 불효. 나이 먹으면 꼰대가 되지 말고, 젊은 사람은 불효자가 되면 안 될진대 나는 둘 다였다. '꼰대 불효자'가 된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아버지는 조용히 연노랑색 폴로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몇 년 전 사드렸던 티셔츠였다. 연노랑이지만 쨍하지 않게 톤이 다운된 그 옷. 온 가족이 나서 '이 색깔 입으니 얼굴이 산다'라고 극찬을 했던 그 옷. 한두 번 입다가 옷장 속에 처박히지 않은 것이 의아했던 그 옷.
그래 뭐 이 정도면 됐다! 적어도 이제 베트남에 70대 블랙팬서가 돌아다니는 느낌은 아니다. 물론 쥐색 긴 바지와 검은색 양말은 그대로였으나 그 정도면 훌륭한 변화였다. 나의 작은 불효로 큰 진보가 일어났다는 합리화를 했다. 아무튼. 이번 베트남 여행에서만큼은 '꼰대 불효자'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하며 호텔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