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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2. 2023

7. 베트남의 K-편의점

새우깡과 참이슬이 말을 걸었다.

써클K 편의점의 비밀


우리는 '메콩'에서 '에덴'으로 복귀했다. 낙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에덴동산이라면 각종 과실나무로 먹을 것이 풍성해야 할 텐데 우리 에덴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편의점에 들렀다. 밤에 먹을 간식이 필요했다. 각종 짭짤이, 달콤이 들은 여행을 풍요롭게 만드는 법이다. 호텔 바로 근처에 '써클K' 90년대 한국에도 있었던 추억의 편의점이 보였다.

추억의 편의점 써클케이


내가 아들만할 때, 전국에 편의점 열풍이 불었다. 동네 슈퍼 아저씨들이 모두 퇴근해도 편의점은 문을 열었다. 24시간 오픈 정책은 센세이셔널했다. 1학년 꼬마는 편의점 사업 전략 따위는 몰랐으나 왠지 모르게 동네 상가 지하에 있는 슈퍼보다 대로변에 새로 문을 연 'LG25'가 더 끌렸다. '엘지이십오시'라고 불리던 그곳. 그런데 이상하게 동네 어른들은 '저기는 더 비싸네, 친절하지가 않네' 라며 한동안 흉을 봤다. 우리 어머니는 출중한 분석가였기 때문에 '쓸데없이 24시간을 여니까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만큼 비싼 거'라고 했다. 어른들이 뭐라든 편의점은 동네 슈퍼를 밀어내며 늘어났다. 옆 동네에 지금은 CU가 된 '훼미리마트'가 문을 열었고, '바이더웨이'의 파란 간판도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편의점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써클K'는 뭔가 특별했다. '엘지이십오시'가 정통 국산 느낌이라면, '써클K'는 이름부터 미제였다. 그냥 '써클'도 불량 서클 같고 멋있는데 '써클K' 라니. 해결사 느낌도 나고, 탐정 느낌도 났다. 미국에서 남몰래 공수해 온 특별한 맛이 나는 과자를 취급하는 비밀 가게 이름 같았다. 당시 나는 스스로 과자를 사 먹을 수 없는 어린이어서 정말로 '써클K'에 가면 외국 과자를 파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달에 3만 원씩 용돈을 받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그즈음 써클K가 한국에서 자취를 감춰 영원히 확인할 길이 없어졌다.


월급을 받는 40살이 되어 찾은 베트남에서 '써클K'를 만났다. 아직 용돈이 뭔지 모르는 1학년 아들과 나에게 용돈을 주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가 함께 온 셈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좀 특별한 것들이 있을까'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릴에 잔뜩 올라가 있는 길쭉한 소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껌승은 벌써 소화를 다 시킨 듯했다. '즉석음식도 베트남식이군. 편의점에서 반미를 팔고, 쌀국수를 팔다니... 써클K 답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며 음료 냉장고 앞을 탐색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 뭐 보셔요?"

"이것 좀 봐라. 완전히 한국이네 여기."


냉장고의 가장 꺼내기 쉬운 메인 층 두 칸에는 한글이 빽빽했다. '국순당 쌀 막걸리, 참이슬, 좋은데이, 순하리, 자몽에 이슬, 건배, 아라...'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한국 술들이 즐비했다. 과자 코너로 가보니 오징어 땅콩과 초코파이, 새우깡, 신라면이 한글 포장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과연 '써클K'에 가면 희귀한 외국 과자를 팔까. 30년 만에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써클K'에는 한국 과자만 많다. '써클K'의 K는 Korea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 시절 '써클K'에 못 가본 것을 억울해하지 않아도 된다. 가봤자 엘지이십오시에도 있는 한국 과자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는 한국인가 베트남인가


한국 과자가 많다고 해서 'K-편의점'이라고 할 수 없으니 '써클K' 라는 브랜드를 쓴 거 아닐까?'라는 웃기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엔 써클K는 미국 편의점이다만. 우리는 'K-편의점'에서 정통 한국 과자 새우깡과 감자칩 몇 개, 맥주 두 캔을 사서 호텔로 복귀했다. 익히 들었지만 베트남도 K열풍이다. 한국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 한국 화장품을 쓰고, 한국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베트남에선 편의점만 가도 웬만한 한국 술, 한국 과자가 다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진짜 K-편의점 GS25에 가보니 떡볶이를 팔고 있었다.

베트남에 떡볶이를 전파하는 K-편의점




베트남에서 살 수 있을까


세계 무대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드밴티지가 더 큰 시대가 됐다. 인생 일대의 기회는 베트남을 포함하여 지구 곳곳에 숨어 있을 거다. 좁디좁은 한국을 벗어날 용기만 있으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70이 넘은 아버지도 꿈을 꾸면서 아들, 손주를 베트남까지 데려왔는데, 검은 머리가 흰머리보다 훨씬 많은 나는 왜 이렇게 닫힌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직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첫 사업에 실패한 바람에 또래보다 가진 것이 없었지만, 결혼은 또 일찍 했다. 요새 아빠의 평균 연령에 비하면 애들도 빨리 낳은 편이다. 10년 전에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업계로 들어와 개척하며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내가 살아온 길을 보고 나를 모험가로 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여전히 보수파다. 모험을 선택하기까진 까다로운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정도의 모험이라면 기왕이면 하던 일과 연관 되어야 할 거다. 그 나라에서 삶을 상상하면 스스로 설레어야 한다. 나는 웬만해선 설레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거기에 신의 인도라고 생각할 만한 수준의 특별한 계기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 전원의 완전한 합의 속에 기쁘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조건이 많다. 살던 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얼마든지 많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야 막연히 해왔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들, 손주의 미래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을 땐, 겉으로는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겠죠."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해 왔다.


베트남 편의점에 진열되어 있는 한국 과자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베트남처럼 성장 가능성 있는 나라라면 한 번 사는 인생 다이내믹하게 살아볼 수 있을까? 5년 후에 나와 가족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편의점 진열대의 새우깡과 참이슬이 '내가 베트남에 와보니 여기 올만 해.'라며 용기를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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