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이공 중앙 우체국에 들르는 관광객들은 주로 본국으로 편지를 부치는 체험을 한다. 이 우체국이 역사적 건축물일 뿐 아니라 '현역 우체국'이라 가능한 체험이다. 하지만 우리 삼부자는 베트남 현지를 느끼는 것이 훨씬 중요하므로 이 활동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다. 게다가 시티투어 버스가 곧 출발이었다.
사이공 중앙 우체국 내부에 시티투어 버스 예매처가 있다. 가격은 인당 150,000동, 8,000원. 입장권이나 체험 티켓을 미리 예매하는 것이 필수는 아니다. 모든 것이 준비 되어야 마음이 안정이 되는 사람 외에는 사이공 중앙 우체국에서 구매하면 된다. 가격이 더 비싸지도 않고, 예약 시간을 맞추려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세 남자는 사이공 전역을 둘러보기 위해 우체국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시티 투어버스에 올랐다. 예상대로 버스는 빨간색이었다. 버스 안에 들어가니 직원이 버스의 주요 경유지를 표시한 지도를 나눠 주었다. 우리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버스 2층으로 올라갔다. 버스의 2층은 승객으로 반쯤 차 있었으나 다행히 가장 앞 좌석은 비어 있었다.
"우와. 아들 어디 앉을래. 앞으로 가자. 제일 앞에."
"아빠 할아버지는요?"
"따라오고 있어"
아들은 할아버지를 챙기면서도 명당을 누가 낚아채기 전에 성큼성큼 앞자리로 걸어갔다. 한 시간 후 이 버스에서 내릴 때쯤이면, 우리는 가볼 곳을 대략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티 투어버스가 출발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사이공 중앙우체국을 출발해 베트남 역사박물관, 벤탄시장 등을 거쳐 사이공 강변을 지나 응우옌후에 거리를 가로질러 인민위원회 청사를 지나 돌아오는 코스였다. 버스에서는 유선 이어폰을 꽂으면 들을 수 있는 음성 가이드를 제공했다. 하지만 우리는 유선 이어폰이 없어서 그냥 지도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혹시 비 오는 거 아닐까요?"
아들이 말했다. 버스가 출발한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앞쪽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해가 쨍쨍했었다. '2층 버스에서 이 햇빛을 다 맞으며 1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아들이 비를 예견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우비 챙겼잖아요. 꺼냅시다. 진짜 비 오겠네요."
우비를 주섬주섬 꺼내는 그 짧은 시간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직감했다. 이 비는 아무리 우비를 입더라도 맞고 버틸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곧이어 엄청난 폭우가 시작됐다. 우리는 2층 버스의 가장 앞에 있었지만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버스 뒤편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승객이 줄줄이 1층으로 내려가야 가장 마지막에 내려올 수 있었다. 줄을 기다리는 시간이 30초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그 사이에 옷이 흠뻑 젖었다. 우비를 입을 겨를도 없었다.
햇빛이 하도 강해 베트남이 우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강렬한 태양은 물을 빠르게 증발시켜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양껏 머금었던 물을 한 순간 뱉어낸다. 1층은 비를 피해 내려온 승객으로 꽉 차 있었다. 쏟아지는 비가 버스 내부로 들어오지 않도록 버스 여기저기에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배수구 있는 버스가 베트남에서 이 정도 비는 일상임을 말해주었다.
여유롭게 밖을 보며 갈 곳을 찾을 계획이었는데, 쏟아지는 비 속에 어디가 어딘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세 남자는 신이 났다. 우리 셋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우비 입고 다시 위로 올라갈까?"
"네. 가요. 가봐요!"
"그래 가보자. 체험이다. 추억이다."
마치 비가 오면 깔깔대며 물 웅덩이로 뛰어 들어가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우비는 꺼낼 필요도 없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투어 버스 한켠에 준비되어 있는 우비를 하나씩 뜯어 입고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었다. 아들이 장군처럼 앞장섰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우산 하나를 챙겨 뒤를 따랐다.
출격하는 할아버지와 손주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본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비를 맞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짐을 챙겨야 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둘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사랑하는 두 남자에게 둘만의 추억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베트남 한복판에서 손주가 그렇게 타고 싶었던 2층 버스를 탔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둘은 무슨 대화를 할까. 노인과 소년의 가슴속에 무엇이 남을까.
이윽고 두 남자가 빗속에서 내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무척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 없었다.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재미있었는지 힘들었는지 예측이 될 텐데 이상하게도 극과 극이었다. 소년은 극한의 짜증, 노인은 극한의 기쁨을 머금고 있었다. 도대체 2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들은 비 속을 뚫고 호기롭게 2층에 올라갔지만 이렇게까지 젖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아무리 비옷을 걸쳤어도 호치민의 우기에 쏟아지는 비를 당해낼 순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내려온 아들이 심하게 짜증을 냈다.
"아 진짜. 엉덩이가 다 물에 젖었어요. 신발도 다 젖었어요. 도대체 왜 올라간 거예요."
이럴 때 '올라간 것도 너의 결정이다, 당연히 젖을 수도 있는 거다'처럼 어른의 언어로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경험상 그렇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들의 막무가내도 일단 다 들어줘야 한다는 쪽은 아니다. 그냥 어린 아들의 예민함이 끓어오르는 상황에서 굳이 기름을 붓지는 말아야 한다는 정도다. 내가 편하려면 그렇다.
육아 DNA로만 따지자면 나도 아버지를 닮았을 거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뭘 하는 것을 제지한 적이 별로 없다. 어렸을 때 딱 한 번, 푸드 트럭에서 '게'를 파는 것이 신기해 만져 봤다가 '남이 힘들게 장사하는 것을 함부로 만진 죄'를 물은 적이 있다. 젓가락으로 회초리를 맞은 임팩트 있는 기억.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왜 그렇게까지 크게 혼을 냈을까는 아직도 남동생과 나의 미스터리다.
아무튼 아버지가 평생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존중'과 '방관' 사이 어디인가다. 어떤 아버지들은 아들의 컨설턴트나 액셀러레이터처럼 산다. 능력이 좋은 아버지일수록 그렇다. 인사 청문회에 단골로 나오는 '어디에 꽂아 주었다더라'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들이 필요로 할 때 크고 작은 도움을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조언일 수도, '나는 이 쪽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일 수도 있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돕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아버지는 뭘 도와주려는 것도, 가르쳐 주려는 것도, 제시하려는 것도 없었다. 한때는 그게 야속하기도 했다. 남들은 아버지가 '이건 절대 안 된다'라고 제지하거나 '너는 이 길로 가라'라고 지시해서 힘들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들이 무엇을 하든, 문제가 있든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정답 없는 인생에 아버지와 터 놓고 상의하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순간에도 아들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DNA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본인이 아들을 도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40대 중반 한창때 IMF라는 파도에 휩쓸려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은행원 중 한 명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문방구 아저씨'가 되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한참 사춘기 호르몬이 영혼을 지배할 때였다. '너네 집은 차가 뭐냐'라는 질문에도 민감할 나이에 아버지가 번듯하게 출근하는 '은행원'에서 '문방구 아저씨'가 된 것은 상당한 사건이었다. 하필 문방구가 내가 다니던 중학교 옆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나는 '문방구 집 아들'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들의 삶이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현실적인 능력이 변변찮은 아버지라면, 아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그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돈이든 인맥이든 어차피 도와줄 방법이 없는데 어떤 조언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전에는 아버지의 방관이 야속하기만 했으나, 나도 아빠가 되고 나니 아버지의 상황이 조금은 상상이 된다.
아버지의 육아가 '존중'이었는지 '방관'이었는지는 아들이 얼마나 잘 컸는가로 성적표를 받는다. 열매를 봐야 나무가 잘 컸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나 알 수 있다. 40살이 된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육아는 '존중'이었다. 그렇게 판명되기 충분하다. '그 문방구 집 아들들이 공부 잘 한대' 소리를 곧잘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아버지는 아들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대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관여하지 않음으로 인해 나는 진로든 결혼이든 삶의 형태든 온전한 어른의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만드는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길이 더 나으니 이 쪽으로 가세요'라고 말하는 컨설턴트도 아니다. 가능성을 믿고 극초기에 약간의 투자를 하고 오랫동안 지켜보는 엔젤투자자 정도로 해두자.
아버지의 인생을 보면 아들이 어떤 삶을 살지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예언자다. 아마 나도 아들에게 '네 식대로 하라'고 말할 거다. 아들이 점점 크면서 사춘기가 되고 자기 생각이 강해지면 아마 그럴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므로. 다만, 아들이 먼저 요청한다면 무엇이든 도울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빠가 나를 방관했다고 느끼는 세월이 되도록 짧았으면 좋겠다.
1학년 아들은 지속적으로 찝찝함을 호소하며 울부짖었으나, 72세의 아버지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손주와 비를 맞으며 2층 버스를 탄 것이 그렇게 좋았을까. 아버지는 마치 인생의 희로애락과도 같은 베트남 우기의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무엇인가를 본 것이 아닐까.
나는 아버지의 웃음을 간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