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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2. 2023

쇼생크 탈출

벤탄시장의 냉혹한 협상왕

삼부자 벤탄시장에 가다


시티 투어버스를 탔을 때 가볼 곳 몇 군데를 점찍었다. 폭우가 쏟아지기 전 10분간의 수확이었다. 아들은 전투기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전쟁 박물관에는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역시 "어디든 좋다."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든 해외에서든 그 지역의 시장은 꼭 가봐야 하는 편이라 벤탄시장에 가고 싶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카드키를 찾아 기분이 좋아진 관계로 벤탄시장에 먼저 가자는 제안도 무리 없이 채택되었다. 


벤탄시장은 100년이 넘은 호치민의 재래시장이다. 호치민 1군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고, 옷이든 먹거리든 생활용품이든 웬만한 것은 다 파는 시장이다. 명품을 카피한 짝퉁 잡화를 파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소위 '베트남 스러운' 물건이 다 있기 때문에 호치민을 찾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벤탄시장에 간다. 코로나 기간 동안 문을 닫았던 상점들이 대부분 열어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여행할 때 '쇼핑리스트'가 아예 없는 사람이다. 현지에서 먹고, 걷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물건을 사 올 필요를 못 느낀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여행 전에 보는 '베트남에서 꼭 사 와야 할 10가지' 같은 리스트는 거들떠보기조차 싫어한다. '남들도 다 살만큼 좋은 거야'라는 메시지로 내가 살 것을 누군가 정해주는 느낌이 싫다. 나에게는 필요도 없고, 끌리지도 않지만 안 사면 손해일 것 같은 압박을 굳이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벤탄시장에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곳에 현실 베트남이 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상인이 있고, 베트남 물건이 있다. 뭐라도 사려면 베트남 사람과 말을 섞어야만 한다. 그들이 장사하는 방법이 어떤지 보게 될 것이다.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질 것이다. 생활의 전선이 보일 것이다. 비즈니스의 활력도가 가늠될 것이다. 선물용으로 쓸 라탄 냄비받침 잔뜩 사 오라는 아내가 내준 숙제도 벤탄시장에서 풀면 되겠고. 삼부자는 벤탄시장에 들어섰다.


"가방 잘 챙겨라. 소매치기 조심해야 한다. 핸드폰도 손으로 잡고 있지 마라."

보안왕 아버지가 북적북적한 벤탄시장 입구에서 정신무장을 시켰다.

"네 아버지, 괜찮아요. 핸드폰 채가는 거 조심하라는 유튜브 영상 그거 저도 봤는데 어쩌겠어요. 핸드폰 들어야 사진도 찍고 하죠. 꽉 들고 있을게요."


아버지는 손주를 놓칠까 손을 꼭 잡았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이 복잡한 시장에 오래 있기는 힘들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입구부터 긴장한 할아버지와 손자



쇼생크 탈출을 위한 협상


"한국싸람? 안냐세요. 다 있어요. 지갑? 옷? 마그넷?"


무엇이 있는지 둘러볼 틈도 없이 상인들이 호객을 시작했다. 장사의 달인 베트남 상인들은 관광객들의 눈동자와 걸음새를 보고 견적을 매기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에게는 얼마까지 받을 수 있겠다'를 판단하는 것이다. 여행책이든 유튜브에서든 벤탄시장에서는 처음에 가격을 워낙 높게 부르기 때문에 많이 깎아야 한다고 했다. 각오를 했다. '절대 밀리면 안 된다.'


"어? 아빠! 여기 체스판이 있어요."

몇 가게를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방과 후 교실에서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 아들은 집에서도 체스를 연습하고 싶어 했다. 집에는 바둑판과 장기판만 있다.  


"그러네. 체스판 종류가 많네."

체스판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 같이 조악했다. 말이 삐뚤빼뚤하거나, 잉크가 번져있었다. 먼지도 가득 쌓여있었다. 하긴 베트남에서 체스판을 사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장의 판매물품 비율로 치면 0.1%도 안 될 것이다. 의외로 가격표가 다 붙어 있었다. '정찰제는 아닐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대략 얼마가 책정되어 있는지 쓰윽 읽어 봤다. 


"아버지, 이게 얼마죠? '0'이 몇 개야? 이백오십만 동이면... 13만 원"

쉼표도 없이 붙어 있는 '2500000' 표기에 한참을 계산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베트남까지 오는 비행기 가격이 25만 원, 체스판의 두 배였고, 호텔의 1박 비용도 그것보다 한참 쌌다. 셋이서 밥을 먹어도 족히 열 끼는 먹을만한 가격이었다. 문제는 이 워낙 화폐의 숫자가 커서 감각이 무뎌진 것과 타이밍 좋게 치고 들어오는 상인의 기술이었다.


"체스? 베트남돌. 핸드메이드. 제일 고급. 원래 이십오만 동. 특별히 이십만 동. 10만 원."


가게 주인은 첫마디부터 정신이 쏙 빠지도록 말하더니 체스판을 비닐봉지에 담아 주려는 시늉을 했다. 가게 주인은 이 체스판이 여기서 가장 고급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허접했다. 만들어진 지 몇 년이 됐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돌을 깎아서 만들긴 했지만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배워 깎아 놓은 느낌이었다. 


"노노노 투 익스펜시브."

"그럼 얼마? 말해봐. 얼마?"


그는 계산기를 들이밀며 내가 원하는 가격을 말해보라고 했다. 복기해 보면 이 협상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승부처는 이때였다. 나는 더 낮은 가격을 말했어야 했다. 13만 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내가 받은 충격을 그대로 상인에게 돌려줘야 했다. 예를 들면 '만원에 주세요. 20만 동'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였을수록 좋았을 것이다. 이 가격이 아니면 안 산다는 결연한 의지, 당신이 나 바가지 씌우는 것 다 알고 있다는 여유로운 목소리, 당신도 한 번 당황해 보라는 당당함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호기롭게 '0' 하나 떼고 10% 가격에 물건을 내놓으라는 말을 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너무하는 것 아닐까, 이 사람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한국 사람 이미지가 괜찮을까, 원가보다 더 싼 건 아닐까' 따위의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 망설이게 만든다. 


"음... 2만 5천 원? 50만 동?"


내가 말할 수 있는 협상가였다. 적혀 있던 가격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20% 주고 사면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마음과 '한국에서라면 이 조악한 체스판을 절대 2만 5천 원이나 내고 사진 않을 거'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나 상인은 계속 잽을 날렸다.


"노우. 이거 진짜 고급. 오케이 그럼 7만 5천 원, 15만 동. 진짜 좋은 가격."

"익스펜시브. 노."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더 이상 비싼 가격으로 이 물건을 살 수 없다. 체스판을 이리저리 들어보며 이 물건 내가 보기엔 별로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상인과 나는 격렬하게 대치했고, 가격은 점점 내려갔다. 그때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대치 국면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나 이거 갖고 싶어요."

협상에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버렸다. 상대방에게 '내가 이것을 꼭 사야 한다는 뉘앙스'를 줘버렸다. 베테랑 상인은 아들 때문에라도 이 사람은 이 체스판을 살 거라는 확신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아들을 협상 테이블로 데리고 들어왔다.    


"썬. 체스킹! 어메이징! 디스 이즈 베스트 프레젠트."


상인은 아들을 집중 공략했고, 아들은 체스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체스판만 있으면 방과 후 교실에서 친구들과 맞붙었을 때, 몰래 갈고닦은 새로운 전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아들은 이미 체스판과 사랑에 빠졌다. 


나의 선택만 남았다. 절대 바가지를 쓰지 않는 냉철한 고객이 되어 아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줄 것인가, 아니면 까짓 거 큰 손 흉내 한 번 내주고 미래 체스 챔피언의 후원자가 될 것인가. 짧은 시간 큰 고뇌가 찾아왔다. 비싸게 사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서면 아들은 얼마나 좌절할까. 


"말도 안 돼. 노 웨이. 너무 비싸요. 안 사요."


나는 고민 끝에 냉정을 택했다. 그리고 후폭풍이라도 짧게 가져가기 위해 아들의 손을 붙잡고 빠르게 돌아섰다. 아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했다. 

"아들, 다른 곳에 가서 체스판 더 보자. 이 사람은 너무 비싸게 팔려는 것 같아."

"나는 그래도 저게 좋단 말이에요. 비숍이 멋지게 생겼는데."

"미안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우리는 그 가게를 떠나 다시 시장을 둘러보러 떠났다. 상인들의 모습을 여유 있게 둘러보며 베트남을 느끼긴 개뿔. 첫 가게에서 진을 다 뺐다. 아들을 협상에 인질로 잡히다니 분했다. 벤탄시장의 상인들은 급이 다른 장사꾼들이구나 생각했다. 나 같은 애송이 고객이 무슨 수로 고수들을 당해낼까 싶었다.


게다가 아버지도 이미 혼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격 흥정에서 필수적인 기싸움을 아주 힘들어했다. 아버지에게 지금 내가 한 협상은 하루 종일 힘들게 서서 장사하는 가게 주인님에게 미안한 일일 뿐이다. 미안할 짓을 길게 하면 몸의 모든 에너지가 다 빠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나에게 "조금만 더 보고 나가자"라고 했다. 그건 분명 '지금 당장 나가자'를 완곡하게 한 표현이었다.


낙심한 어린이, 패닉 한 노인, 그 사이에 낀 아저씨. 세 남자는 벤탄시장이라는 야생 한 복판에 있었다. 이쯤 되면 벤탄시장은 손절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치며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이! 체스킹! 챔피언! 2만 5천 원!" 

헐레벌떡 뛰어 온 상인은 내가 말했던 가격 2만 5천 원에 체스판을 주겠다고 했다. 패잔병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역전승의 순간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를 원하냐고 물어볼 때 당당하게 '만원'이라고 말할걸이라는 후회를 잠깐 했으나 이 가격이면 괜찮았다. 당신이 정 그렇게 붙잡는다면 내가 한 번 사주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들에게는 의기양양하게 "이 아저씨가 아빠한테만 싸게 준대"라고 했다. 아들은 후반 추가시간 대역전 극장골을 넣은 손흥민 선수가 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승리했다. 나는 얼떨결에 협상왕 자리에 등극했다. 무조건 '4달러'를 외치던 드라마 야인시대 속 김두한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수 틀리면 거침없이 일어나는 냉철한 협상왕이었다. 


우리는 가게로 돌아가 신문지에 돌로 된 체스말을 둘둘 말아 포장해 주는 모습을 구경했다. 다시 보니 허접하긴 해도 귀여운 맛이 있었다. 우리가 산 체스말은 베트남 사람들을 닮았다. 폰은 한국의 삿갓 같은 베트남 모자 '논'을 쓰고 있고, 룩은 베트남식 탑 모양이었다. 아들은 무거운 체스판과 말을 스스로 들었다. 어렵게 얻을수록 더 소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앤디 듀프레이가 탈옥을 위해 밤마다 감옥 벽을 조금씩 파낸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돌로 체스말을 만드는 취미가 있는 척한다. 앤디를 쇼생크에서 탈출시켜준 체스말처럼, 베트남산 핸드메이드 체스말은 우리가 벤탄시장에서 승리의 탈출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체스킹을 향한 지옥훈련만이 기다리고 있다




쇼생크 탈출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내가 부탁한 라탄 냄비받침을 호가의 15% 선에서 샀다. 그리고 나의 협상왕 등극에는 관심도 없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협상에서 기억할 두 가지를 정리해 말했다.


"벤탄시장 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아무 거리낌 없이 최저가격을 말하는 용기예요. 만원이면 그냥 천 원에 달라고 하는 용기요.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 사람들 다 베트남에서 제일가는 부자래요. 두 번째 중요한 게 뭔지 알아요? 원하는 가격에 안 주면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그럼 둘 중에 하나겠죠. 줄 수 있는 가격이면 주거나, 안 되면 그냥 보내거나. 그럼 백전백승이네요."

"그러네. 그렇겠다."

"그럼 이거 싸게 산 거죠? 잘했어요. 아빠."


아버지에게는 억지 동조를 아들에게는 엎드려 절을 받았지만 그래도 기뻤다. 언젠가 베트남에서 비즈니스를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생 베트남에 떨어져도 가족 굶기진 않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바가지 상인을 상대로 고작 몇 만 원 깎은 것 치고는 값진 수확이었다.


우리는 승리 기념으로 벤탄시장 근처에 있는 꽤 비싼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고, 꽃게가 들어간 국수와 꽃게찜을 파는 가게에서 꽤 비싼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꽃게 국수 값이 비싼 것 아니냐고 하면서도 국물이 진하다며 좋아했다. 아들은 꽃게 탈을 쓰고 손님을 맞는 사람과 하이파이브했다. 그리고 진열되어 있는 꽃게의 집게 다리를 만져보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 남이 파는 꽃게에 손을 댔다고 젓가락 회초리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손주에게는 "만지면 안 된다."고만했다. 근처에 어벤저스 피겨를 파는 가게 구경도 했다. 아들은 더 이상 덥다고 짜증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삼부자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호텔까지 거리를 그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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