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누구나 어린이였다
투어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니 버스를 부술 기세로 내리던 비가 그쳤다. 신기할 정도였다. 이것이 베트남의 우기다. 문제는 젖을 대로 젖은 옷과 아들의 기분이었다.
"흥. 저는 아무 데도 안 가요. 다 젖었다고요. 빨리 호텔로 돌아가요."
"아들, 여기 중앙 우체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통일궁도 있고 벤탄시장도 있어. 나온 김에 보고 가면 어떨까? 다시 해가 떴으니까 가다 보면 금방 마를 거야."
"아니요. 그랩 아니면 한 발자국도 안 가요."
아들은 힘들면 어깨를 축 늘어 뜨리고 입을 쭉 내민다. 입술은 또 두꺼워서 이럴 때 보면 입술이 닭똥집이 된다. 그 입술조차 나를 닮은 거긴 하지만. 아이스크림 사 먹자고 당근도 줘보고, 이런 식이면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협박도 해봤지만 실패했다. 아무래도 그랩을 불러 호텔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 다 못 보면 또 오면 된다. 어린이의 파업은 웬만하면 들어주기로 손을 들었다. 잽싸게 그랩을 타고 호텔로 들어왔지만 아들의 짜증은 계속 됐다.
"아들, 과자 사 먹으러 편의점 갈까?"
"아니요, 싫어요"
"그럼 저녁 뭐 먹을지 아빠랑 같이 검색해 볼까?"
"몰라요. 아빠가 찾으세요"
아들이 속을 긁었다. 슬슬 화가 났다. 한국에서라면 벌써 한 소리 듣고 울고 있을 거면서 베트남이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싶었다. 사실 아들은 한결 같이 못 참고, 한결 같이 짜증을 부린다. 아직 마음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어린이답게 반응한다. 그에 비해 나는 매일 변덕스럽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끝까지 기다려주지만, 좀 피곤한 날은 단 1분 만에 화를 버럭 낸다. 베트남에서는 그 한계가 20분이었나 보다.
"그럼 도대체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이제 제발 그만 좀 짜증 내. 그렇게 힘들면 그냥 누워서 자든지!"
"수영하고 싶어요..."
아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수영장이었구나. 밤까지 수영을 했는데 아침부터 또 수영장을 가자고 하면 아빠가 안 된다고 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들의 짜증을 멈출 답을 알았으니 안 될 것 없었다. 아침 일찍 비도 한바탕 맞았는데 그대로 물속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침 아버지는 혼자 숙소 주변에 산책을 가고 싶다고 했다. 구글 맵 쓰는 법을 알려드렸지만 혼자 갈 때는 종이 지도가 편하다고 했다. 파리 배낭여행 때도 파리 시내 전체를 지도책 하나 들고 다녔던 것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호텔 근처에 따오단 공원이라는 큰 공원이 있었다. 시내를 오가며 계속 지나다녔던 공원인데 따뜻한 남쪽 나라답게 나무들이 무지막지하게 컸다. 비 맞고 볕 받고를 수도 없이 반복하니 순식간에 자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날씨라면 한국에서는 수십 년 걸릴 성장을 몇 년이면 해 내지 않을까.
아버지는 산책을 원해 공원으로 갔고, 어린이는 수영을 원해 수영장으로 갔다. 사실 나도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혼자 골목을 걸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어떤 가게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관광객의 눈이 아닌 정탐꾼의 시선에서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이를 돌봐야 했으므로 그것은 밤에 혼자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들과 나는 다시 수영복을 꺼내 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영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물에서 나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고작 한 번 수영 수업을 받았을 뿐인데 아들은 수영에 빠져있었다. 물론 물에 빠지는 것보단 수영에 빠지는 게 낫다. 그렇지만 수영만 할 거면 한국에서 수영장에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것에 순식간에 깊이 빠져 버리는 것도 내가 물려준 유전자겠거니 생각했다. 아들이 나와 닮았다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관심을 뚝 끊고 다른 것을 찾겠지.
<1학년 수영 일지>
12:00 수영을 시작했다. 아들은 어제보다 잠수 기록이 향상되었다.
12:30 다시 비가 시작됐으나 우천 취소 없이 수영이 지속되었다.
12:40 빗줄기가 굵어져 일시적으로 수영이 중단됐재만, 5분 만에 재개되었다.
13:00 쌀국수와 짜조, 햄버거를 주문해 추가 수영에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였다.
13:20 식사 종료 직후 아들은 수영을 재개했다.
14:00 아들에게 수영 종료 및 휴식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
14:30 2차 수영 종료 제안이 거부되었다.
15:00 3차 수영 종료 제안이 거부되었다.
15:30 보호자 직권으로 수영이 강제 종료 되었다.
아들은 밤까지 수영장에 있겠다고 할 기세였다. 과장을 보태면 베트남에서 수영을 마스터해 물에 빠진 아빠를 구할 수준까지 갈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들과 함께 물속에서 한참 손발가락이 쪼글쪼글해지던 그때, 산책을 마치고 호텔방에서 휴식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보이스톡이 울렸다.
"그 뭐냐. 호텔 카드키가 없어졌다. 30분째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전화 넘어 아버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초조하면 미간이 상당히 찌푸려진다. 목소리만으로 아버지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나와 아들은 아버지를 도우러 가기 위해 수영을 강제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들에게 했던 수영 종료 제안이 3차례나 거부되었던 터라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터면 하루 종일 수영만 할 뻔했다. 방으로 내려가자 아버지는 부산히 방을 뒤지고 있었다.
"하이고. 어째야 쓰까.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가 카드키를 찍고 방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무조건 방에 있겠죠."
"그런데도 없다. 아까 공원에 갔다가 떨어뜨린 건 아닌가 모르겠네."
"방에 들어와서 문 옆에 카드 구멍에다가 안 꽂으셨어요?"
"기억이 없다. 들어와서 한참 쉬는데 불이 어둡더라. 카드키 꽂아야 불을 켤 수 있잖아. 그때부터 찾는데 없다. 내가 이렇다. 이렇게 깜빡깜빡한다니까. 큰일이다 큰일이야. 노인들이 이래서 안 된다."
"아버지, 뭘 그렇게까지요. 나도 잃어버려요. 그만 좀 하셔요."
아버지의 '노인성 자책'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다. 옛날 같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많은 변화가 생긴다. 어떤 노인들은 고집이 세다. 내 안의 꼰대력을 가꾸고 키우다 보면 노인의 완고함이 된다. 그것이 극에 달하면 어떤 주변의 소리도 쓰잘머리 없는 것이 된다. 또 다른 노인들은 자책한다. 몸과 정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느끼면 좌절한다.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여긴다. 노인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아버지의 경우 다행히 꼰대는 아니다. 대신 자책을 한다. 평소에도 나는 지하철 공짜로 타는 '지공 노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옛날 같으면 증손주까지 거느린 왕할아버지가 되어 허리가 아파 뒷방에 누워있을 나이라는 말을 한다. 호텔 카드키를 어디에 뒀는지 몰라 찾는 상황은 노인성 자책이 폭발할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도 어느 순간 맞이할 변화일지 모른다. 수영장에서 나올 줄 모르는 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노인이 된 나에게 '제발 그런 자책 좀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좀 더 나은 노인 됨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할 뿐이다.
아버지는 때로 심하게 자책하는 '자칭 노인'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늙지 않으려면 끝없는 연구 필요하다는 지론이 있다. 경청하고 덜 말한다. 아들 손주를 베트남까지 끌고 온 탐험가이다. 두 번의 암을 이겨낸 전사다. 항상 나만의 연구 과제가 있는 학자다. '나는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버지 정도면'이라고 답할만하다.
"할아버지! 여기 있네요!"
아들이 소리쳤다. 호텔방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아 반 포기 상태였던 어른들과 달리 아들은 이것저것을 다 들춰보는 중이었다. 침대 밑과 화장실 쓰레기통까지 뒤져도 나오지 않던 카드키는 커피와 차 티백이 놓인 박스 밑으로 쏙 들어가 있었다. 박스 밑에 공간이 있어 밀려 들어갈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편견 없는 어린이가 모든 물건을 들쳐본 것이다.
"오 아들!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거길 들쳐볼 생각을 했어?"
"그냥 하나씩 들어본 건데요?"
"아이구야. 찾았구나. 거기로 들어갔네. 거기다 두고 그렇게 찾았다. 내가 이런다. 잘했다. 잘했어. 역시"
조금 전까지 비에 젖어 짜증이 나고, 수영을 멈춰야 해서 시무룩했던 어린이와 한 때는 잘 나갔으나 지금은 깜빡깜빡하는 자신을 탓하는 노인은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슬램덩크 강백호와 서태웅 뺨 후려칠 정도의 눈물 나는 협동이었다.
누구나 어린이였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