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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7. 2024

월남전에 파병 됐더라면

아버지는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호치민 전쟁 박물관


7시가 되기 전에 눈을 떴다. 우리는 에덴스타 사이공 호텔의 두 번째 조식을 먹었다. 아버지는 다른 음식들을 제쳐두고 쌀국수 코너로 먼저 갔다. 아버지는 무조건 쌀국수 파다. 쌀국수만 먹어도 몇 주는 살 수 있을 만큼이다. 점심은 다른 종류의 쌀국수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도 호텔 식당의 분위기에 적응했는지 혼자 쌀국수 코너에 가서 "원 플리즈"라고 말하고 한 그릇을 타왔다. 


"원 플리즈" 혼자서도 잘한다.



"할아버지, 오늘은 거기 가요. 그때 버스 타면서 봤던 전쟁 박물관이요. 거기 전투기가 있었어요."

"그래 가자. 베트남 역사를 알아야 한다."

"아빠도 궁금하네. 베트남 역사. 할아버지가 공부 많이 하고 왔으니까 가서 모르는 것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면서 보자."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어린이는 전투기 모형을 볼 생각에 설렐 뿐이었다. 우리는 호치민 전쟁박물관을 목적지로 찍고 그랩을 불렀다. 박물관은 7시 30분부터 오픈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가기 위해 일찍 호텔을 나섰다. 오전에 전쟁박물관과 그 옆의 통일궁을 구경하고 더워지기 전에 점심을 먹고 돌아오기로 했다. 


베트남의 그랩 기사는 웬만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그랩 기사들이 승객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던 것과 사뭇 달랐다. 지난 싱가포르 여행에서 만난 그랩 기사에 대해서 많이 안다. 고향이 중국 윈난성인 분, 한국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던 분, 우리 아들만 한 딸이 있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그랩 기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차이일까. 베트남도 우리나라처럼 본인의 정치 성향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기사님들이 많았을까. 어떤 승객들이 피로감을 표출하다 보니 '스텔스 모드'가 그랩의 기본 서비스가 된 것일까. 공상을 하다 보니 5분 만에 전쟁박물관에 도착했다.


호치민 전쟁박물관 역시 1군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서 표를 사고 들어가면 된다. 어른은 40,000동, 어린이는 20,000동. 한국돈으로 2,000원, 1,000원이니 저렴한 가격이었다. 베트남은 주요 관광지들의 입장료가 매우 싼 편이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시설이니 가능한 가격 정책이다. 승전국 베트남의 입장에서 자국민과 외국인 모두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역사라 투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침 8시도 되기 전 전쟁 박물관에 도착했다. 삼부자가 거의 첫 관람객인 듯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10척에 가까운 전투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베트남전 당시 사용하던 전투기를 복원해 놓은 것 같았다. 베트남의 전투기뿐 아니라 U.S.AIR FORCE라고 쓰여있는 전투기와 UNITED STATES ARMY라고 쓰인 헬기도 있었다. 나는 베트남은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들은 웅장한 전투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빠, 저거 봐요. 저 전투기에는 미사일이 엄청 많이 달려 있어요."

"그러네. 저기에 달린 미사일로 폭격을 했나 봐. 어때?"

"멋있어요. 저거 타볼 수는 없죠?"

응. 타 볼 수는 없어.




역사 속의 한 사람


아들은 전투기가 멋있다고 했다. 보이는 대로 편하게 말하는 어린이와 달리 전쟁 박물관에 들어가는 어른들은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다른 관람객도 없이 적막한 것도 있었지만, '전쟁'이라는 역사가 주는 무게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특히 아버지는 목소리도 작아졌고, 발걸음도 느려졌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왜 이렇게 조용하세요? 긴장하셨어요?"

조용한 아버지를 보고 내가 물었다.

"참, 여기에 올 뻔했는데."

"아버지도 베트남 전쟁 때 참전 할 뻔했다고요?"

"그렇지. 군대 때 월남에 파병 갈뻔했지. 마침 그때 월남전이 끝나서 안 가게 됐다. 그때 베트남에 왔으면 아버지는 여기 미안해서 오지도 못했을 거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버지의 군 생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육군 수송대대의 정비병 출신이라는 것뿐이었다. 하긴 베트남전 당시 파월된 군인이 35만 명이라고 하니 아버지도 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월남전이 막바지이던 1972년에 육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75년 베트남 통일과 함께 제대했다. 원하면 월남에 파병 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전쟁의 막바지 미국 측 연합군의 철군 검토와 함께 파병 티오가 줄어드는 시기라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비롯한 윗 세대가 그 위험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길 원한 이유가 궁금했다. 치열한 사상의 시대에는 개인들도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지키겠다는 일념이 있었을까. 아니면 투철한 국가관으로 '국가가 부르는 곳 어디든 가리라'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베트남에 다녀오면 괜찮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도 그렇지. 돈이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을 텐데. 35만의 파월 군인들의 파병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군생활을 하던 2005년 우리 부대에도 파병 자원 신청서가 내려왔었다. 9.11 테러로 촉발된 이라크 전쟁에 평화유지군으로 설치된 자이툰 부대에 파병되길 원하는 사람은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자이툰부대로 파병을 가면 여러 혜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라크에 몇 개월 다녀오면 긴 휴가를 준다고도 했고, 천만 원이 넘는 파격적인 급여도 제공된다고 했었다. 지금은 사병 월급도 백만 원에 가깝다고 하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당시 월급은 3-4만 원이 고작이었다. 


평화 유지군으로 비전투 지역의 후방 임무 중심이라곤 했으나, 기본적으로 전쟁 지역에 파병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경쟁률이 있었다. 나도 이라크행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당시 나에겐 두 마음이 있었다. 어차피 할 군생활인데 전역하면 쓸 학비를 벌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하나였고, 그래도 위험한 곳인데 굳이 자원해서 가야 하나라는 망설임이 다른 하나였다. 


이라크로 파병을 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서도 필요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했으나 역시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결국 나는 자이툰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라크가 위험해서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일개 일병이었던 내가 파병을 가면 같은 내무실의 선임들이 내 몫까지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부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내가 자이툰에 가면 병장급들도 다시 한글과 피피티 작업 실무에 투입되어야 했다. 한 사람이 파병을 가더라도 행정병의 추가 배치는 없을 것이라 했다. 나는 고참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이툰 부대에 지원하지 못했다. 


냉전시대 끝자락에 세계사적 슬픔의 현장 베트남. 참전 한국군 35만 명. 참전의 이유와 불참의 이유는 35만 개다. 그중엔 나처럼 고참의 눈치를 보고 파병가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고참이 너도 함께 가야 한다고 해서 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파병 수당이 필요했던 사람도, 6.25 때 북한군에게 가족을 잃어 공산 진영에 복수하고 싶었던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속 부대가 참전이 결정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세계사는 집단을 기록하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몇 명이 사망했는지, 어떤 작전이 있었고, 뒤에서는 어떤 협상이 오고 갔는지, 전쟁이 가지고 온 결과가 무엇인지 기억한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는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다. 아버지가 그랬고, 내가 그런 것처럼 아들도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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