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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2. 2023

15. 통일의 시대

그날은 올 것인가

장사 고수 코코넛 아저씨 


삼부자는 두 시간 동안 전쟁 박물관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오전 10시였지만 해가 뜨거웠다. 저절로 땀이 흘렀다. 나는 땀이 많다. 한국에서도 여름만 되면 땀과의 전쟁인데, 베트남에서는 더 치열한 전쟁이었다. 아들은 나를 닮았다. 아니 나보다 땀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린아이들처럼 키가 작으면 콘크리트 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지열에 더 가까워 더 덥다고 하던데, 아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모두 큰 모자를 썼다. 땀을 최대한 배출하기 위해 샌들을 신고 운동복 재질의 반바지를 입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까만 긴바지에 양말을 신었으나 나는 더 이상 잔소리 하지 않았다. 옷은 자기가 알아서 입는 것이다.


삼부자의 다음 목적지는 통일궁이었다. 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를 못 찾아 헤맸다. 그때 세 남자의 옆으로 코코넛 지게를 맨 한 남자가 지나갔다. 아니 지게도 아니었다. 기다란 대나무에 한쪽 끝에는 코코넛이 든 바구니, 다른 한쪽에는 잡동사니를 넣은 박스를 매달아 놓고 한쪽 어깨에 얹어 들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남자를 붙잡고 구글 맵을 보여 주며 물었다.  


"신 짜오. 디스? 징덕럽? (Dinh Độc Lập) 웨얼 이즈 엔터런스?"


남자는 영어를 잘할 줄 몰랐지만 우리가 통일궁 입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남자는 웃는 얼굴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코코넛 지게를 들고 앞서 걸었다. 관광객이 많은 통일궁 앞에 가서 코코넛 주스를 팔 계획인 것 같았다. 우리는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문득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 코코넛 주스 한 잔 할래요? 아들 어때? 더운데 한 잔 할까?"

"그래 먹자 코코넛 주스. 카페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먹는 게 더 좋지"

"저도 먹을래요."


나는 앞서 가던 남자를 다시 불렀다. "코코넛"이라고 말을 하자마자 남자에게 화색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우리 삼부자가 코코넛 고객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안녕하쎄요. 코리안 패밀리. 스위트 코코넛 주스 "

남자가 코코넛 위 부분을 칼로 잘라 빨대를 꽂아주며 말했다. 영어를 못 하는 줄 알았던 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 본 고수는 그 사람의 느낌만 봐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안다. 그는 고수였다. 그는 웃으며 어깨에 코코넛 지게를 얹어 주었다. 지게를 들고 사진도 찍고 체험해보라는 것이었다. 무거웠다. 이제 꽤 구도를 잡을 줄 아는 아들에게 핸드폰을 주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한국 사람 중 코코넛 지게를 들어본 사람은 몇 없을 거라 생각하니 우쭐해졌다.  


내가 코코넛을 몇 개 달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 세 번째 코코넛을 열고 있었다. 사람이 세 명이니 세 잔을 팔아야겠지. 벤탄시장에서의 바가지가 생각나 급히 그를 제지하며 얼마냐고 물었다. "한 개에 5만 동" 그는 한국말로 가격을 말해주었다. 2,500원. 휴. 안심했다. 3개를 사도 10,000원이 안 되니까 괜찮다. 베트남 물가 치고는 싼 것이 아니지만, 세 남자가 길거리에서 목을 축이며 생 코코넛 주스를 빨아먹는데 이 정도는 쓸 수 있었다. 


세 남자는 코코넛을 하나씩 들고 '짠'을 했다. 아버지는 "저 친구 장사 정말 잘한다. 고수다. 기분이 딱 좋게 해 주잖아"라고 했다. 아들도 생전 처음 마셔보는 코코넛 주스의 맛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역시 여행의 재미는 예상 못 한 작은 이벤트다. 더위가 물러가는 시원함이었다. 

코코넛 짠



베트남 통일궁 


통일궁은 호치민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대부분 들르는 곳이기에 다소 복잡하지만, 박물관을 둘러보듯 사색하며 찬찬히 둘러보면 좋은 곳이다.


베트남 통일궁은 여러 번 주인과 이름이 바뀐 베트남 현대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통일궁은 1873년에 프랑스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통일궁은 '노로돔 궁전'이라고 불렸다. 노로돔 궁전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던 1945년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지배하던 프랑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53년 호치민 주석의 베트민이 프랑스를 몰아낸 후 노로돔 궁전은 '독립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기념했을 것이다. 1955년 사이공에 자유주의 노선의 베트남 공화국 (남 베트남)이 수립된 이후에는 대통령의 관저로 쓰였다. 1975년 호치민 주석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이 통일되면서는 다시 이름을 '통일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역사는 너무도 많이 닮았다.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중국대륙과 접해 언어적으로는 한자를 썼고, 정치적 영향권 아래 있었다. 큰 나라 중국에 사대의 예를 갖출 것이냐는 왕조 시대의 핵심 논쟁이었다. 1800년대 중반,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와 우리의 조선왕조는 이제 힘을 잃은 청나라 대신 각각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베트남과 한반도 모두 냉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나라는 모두 남북으로 갈라져 이념의 대리전을 치렀다.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경험했다. 두 나라의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은 '통일궁'의 시대를 맞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선'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기독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는 한반도의 통일이 다가올 신의 섭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정치적 견해나 바라는 통일의 형태는 다르지만, 신의 뜻은 언제나 '화해'이고 '연합'이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 민족에게도 연합의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리고 20대 젊은이답게 몇 년의 열정을 그 분야에 바쳤다. 다가올 통일의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회사를 꿈꾸며 함께 창업을 했다. 북한산 농산물을 수입했고, 상품화해 남한에 소개했다. 한반도의 북쪽에도 최고급 자연농산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탈북한 청년들을 고용해 디저트 매장을 열었다. 북 출신 친구들은 요리를 했고, 서빙을 했다. 디저트 브랜드는 맛있기로 입소문을 탔고, 강남에서 나름 유명한 매장이 되었다. 백화점에 입점했고, 지점을 여럿 오픈했다. 연평도 포격 이후 경색된 남북 관계 하였지만, 북한의 어린이에게 신발을 보내는 프로젝트 등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때 나는 '휴전선'의 시대를 살며 '통일궁'을 바라봤던 것 같다. 물론 통일의 과정이 베트남과 같기를 바라진 않았다. 전쟁과 점령의 통일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통일이 오길 바랐다. 


나의 선택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어머니는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모범생 인생을 살던 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할 시기에 갑자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업을 한다니 세상 어느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많이 가는 길 중에 선택해도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머니는 반대를 거듭하다 몸져누웠다. 나와는 몇 달간 말도 섞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도 역시 내 선택을 존중했다. 아버지의 침묵은 어머니의 격렬한 반대와 대비되었다. 그때만큼 아버지의 방임이 고마웠을 때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침묵으로 격려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나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지도 않을 통일을 꿈꾸며 맨 땅에 헤딩하듯 무일푼으로 사업 전선에 뛰어든 아들이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뒤, 부모님께 3년 계획을 프레젠테이션했다. 제발 아들을 믿어달라는 제스처였다. 침묵을 유지하던 아버지는 그 후, 나에게 힘을 주는 말들을 적극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요즘 시대에는 그렇게 큰 꿈도 꿔보고 해보고 싶은 경험도 해야 돼. 대기업 무슨 비전이 있겠니. 아빠도 봐라. 은행 평생 잘 다닐 줄 알았는데 IMF 와서 나왔잖아. 회사만 다니다 나오면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정말 좋은 선택을 한 거다. 탁월한 결정이다. 계속해봐라. 젊었을 때 해봐야 해. 너 같은 전문가는 나중에 통일부 장관으로 부를 거다. 네가 만든 그 북한에서 수입한 블루베리 주스 역시 좋더라. 이게 항산화 작용이구나. 눈이 확실히 덜 침침하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조금씩 아들의 뜻을 수용하며 고통 속에서 나왔다. 어느새 어머니는 내가 파는 주스와 디저트, 파스타와 커피를 가장 많이 팔고 소개하는 명예 영업이사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 당시 서로 다른 뜻을 품고서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동안 본인의 침묵 스타일을 버리고 격려의 물꼬를 트자, 마침내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통일의 시대'로 들어갔다.


그 이후 나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회계사가 되었으면 이 재미를 몰랐겠지. 대기업에 갔다면 종종 삶이 지루해 견디기 힘들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산다. 아버지는 여행에서도 여전히 나를 격려하고 세워준다.


"네가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었을 거다. 이렇게 훌륭한 곳들을 찾아주니까 여행이 최고로 즐거워지는 것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셋이 같이 오니까 얼마나 좋으냐. 아버지 프랑스 여행 갔을 때 혼자니까 식당에도 잘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세명이니까 벌써 딱 좋잖아. 네가 빨리빨리 찾아주니까 아주 좋다. 아버지는 베트남을 유튜브로 공부했지만 너는 상당한 경제 전문가니까 역시 보는 게 다르구나." 


한반도에도 '통일궁'의 시대가 올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 삼부자는 베트남에서 아버지 덕분에 매 순간 통일을 경험했다. 


통일궁에서 밖을 바라보다



셋이니까 쌀국수 네 그릇


우리는 통일궁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찐 로컬 식당에 들어갔다. 한 번이 어렵지 그 이후로는 어떤 로컬 식당이라도 두렵지 않다. 후 띠유 (Hu Tieu)라고 쓰인 노란 간판이 눈에 띄었다. 후 띠우 라면 '퍼' (Pho) 같은 쌀국수의 한 종류다. "나는 무조건 쌀국수면 된다. 이게 최고다."라고 말했던 아버지가 다양한 쌀 국수를 체험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의 분위기가 특이했다. 국수를 만들어 주는 곳은 한켠의 작은 수레인데, 홀의 규모는 노상을 포함해 상당히 컸다. 어느 테이블에 앉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긴 했지만 손님도 하나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구글 지도를 켰다. 이 식당을 찾아보니 무려 5.0의 별점을 자랑하는 맛집이었다. 아무 데나 들어왔는데 대성공이었다. 



"우와. 여기 별이 다섯 개예요! 아버지, 여기 쌀국수는 먹던 거랑 좀 다를 겁니다. 국물 있는 걸로 드실래요 아니면 비빔?"

"나는 국물 있는 걸로"

국물파 아버지가 말했다.

"저도 국물이요."

국물파 할아버지의 손주가 말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비빔국수를 먹어보기로 했다. 역시 찐 로컬 식당답게 모든 메뉴는 베트남어로만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여행책과 파파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주문을 했다. 새우가 들어간 맑은 국물의 쌀국수와 짭짤한 베트남 양념간장에 비벼 먹는 비빔면이 나왔다. 


"아빠, 저 그거 먹어보면 안 돼요?"


아들이 국물 쌀국수를 한 입 먹어보더니 입에 맞지 않는 듯 내가 주문한 비빔 쌀국수를 가리켰다. 내 메뉴를 먹지 못할 리스크는 어린 아들과 외식하는 아빠라면 감당해야 한다. 아들 것으로 주문한 음식이 맵거나 입에 안 맞아 먹기를 거부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아들을 굶길 순 없으니 내 것을 내어주고, 나는 아들이 주문한 음식을 먹는다. 나는 평양냉면을 먹고 싶은데 내가 주문한 냉면을 다 뺏기고 뜨뜻한 온면을 먹어야 할 때의 당혹감이란.


아들은 비빔 쌀국수를 먹고 엄지를 척하고 들었다. 이제 이 국수는 내 거라는 신호였다. 내 것을 못 먹는다는 아쉬움보다 처음 먹어보는 새로운 음식을 신나게 흡입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래 나도 아빠는 아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40년 차인 할아버지는 국물 쌀국수에 만족해했다.


"아버지, 로칼 푸드 맛이 어떻습니까?"

"국물 맛이 좋고요. 칼국수처럼 맛이 아아아주 좋습니다. 아아아주 좋아요."

"아아아주 좋습니까? "


아버지가 리듬을 탔다. 이번 쌀국수에도 만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쌀국수 한 그릇의 양이 적었다. 나는 아들이 넘겨준 국물 쌀국수를 아버지에게 덜어주고, 주인장을 불러 비빔 쌀국수를 한 그릇 더 시켰다. 3,500원 한 그릇을 더 시켜 먹으면 아들을 원망하지 않아도 됐다. 세 남자는 함께 국수 네 그릇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일어났다. 찐 로컬 식당에서도 어려움 없이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마치 베트남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삼부자. 베트남에 적응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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