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점심 식사 이후에 업무를 멈추고 낮잠 시간을 갖는다. 오전 7시 정도에 워낙 일찍 일과를 시작하기도 하고, 오후 나절의 폭염에는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기도 할 것이다. 호치민에 며칠 있어보니 정말 한낮에는 참기 힘든 더위가 이어졌다. 그러다가도 해가 살짝 넘어가는 오후 4~5시만 되어도 낮보다는 한결 나은 환경이 된다. 물론 그때도 덥지만 한낮에 비하면 한풀 꺾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세 남자도 마치 베트남 사람이 된 것처럼 호텔에 들어와 낮잠을 잤다. 에어컨을 선선하게 틀어놓고 암막 커튼을 치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충전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저녁 일정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듯했다. 우리는 다섯 시가 넘어 뜨거운 열기가 잦아들 때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아빠, 우리 어디 가요?"
"가볼 만한 곳이 많지. 어제 투어버스 지도 가져와 봐. 네가 가고 싶은 곳 가자."
"제가 골라도 돼요? 우리가 지금 갔던 데가 어디죠? 전쟁 박물관 갔다 왔고, 벤탄시장도 갔고... 동물원? 여기 동물원이 있어요. 여기 가요."
"동물원 가고 싶어? 베트남 동물들은 뭐가 다른지 보면 재밌겠네. 그런데 동물원은 아마 저녁에 문 닫을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더워지기 전에 가는 거 어때?"
"지금 가고 싶은데... 알았어요. 대신 내일 꼭 가요. 호랑이 있나 봐야 돼요. 베트남에도 호랑이가 있는지는 알아야겠죠?"
아들은 호랑이의 팬이다. 지난 어린이날 아들과 나는 호랑이가 있는 어린이 대공원에서 일대일 데이트를 했었다. 아이들은 1학년이 되면 진정한 어린이가 된다. 그전까지는 다 '아가'일뿐이다. 다섯 살 둘째는 아직 'ㄹ' 발음을 어려워하는 아가다. 둘째는 '호랑이'와 '호양이' 사이 어딘가의 발음을 한다. 1학년이 되면 사라질 그 발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런 발음을 들을 때마다 '천천히 커라' 주문을 외운다.
큰 아들은 이제 호랑이를 호양이라고 하는 사랑스러움은 없지만, 호랑이가 왜 멋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호랑이가 동물 싸움 순위 몇 위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읊는다. 자기의 생각을 열심히 말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 아가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린이다. 큰 아들은 학교에 들어가더니 부쩍 멋있는 말을 쏟아낸다. 1학년 어린이가 되고 처음 맞이하는 어린이날을 특별하게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어린이 대공원에서 호랑이를 본 아들은 그 뒤로 호랑이의 팬이 되었다.
"아빠, 그럼 여기 가요. 사이공 전망대. 여기 높이 올라가서 보는 전망대 맞죠? 그때 우리 남산타워 위에 못 올라갔잖아요. 진짜 올라가고 싶었었는데"
베트남에 오기 1년 전 여름, 두 아들을 데리고 남산을 올랐다. 오늘은 제발 '밤소풍'을 가자는 두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에게 휴식을 주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었다. 우리 가족에게 밤소풍은 즉흥적으로 어디든 가서 바람을 쐬고 들어오는 일탈을 의미했다.
아이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자고 졸랐으나 케이블카 승강장과 멀었을뿐더러 '밤소풍'을 남산으로 왔다는 이유로 몇만 원을 쓸 순 없었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며 계단을 올랐다. 뽀로로가 즐겨 부르는 '바나나 차차' 노래를 불렀다. 중간 어디부터는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와 땀이 뒤섞여 흘렀으나 두 아들과 나는 특별한 밤소풍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힘이 났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 이미 8시였으나 걱정은 없었다. 어느새 N서울타워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는 버스를 타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남산 밤소풍은 나에겐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남산을 정복한 특별한 시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아들은 그날 N서울타워 전망대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 같다.
"남산타워 못 간 게 그렇게 아쉬웠어? 그때 너무 늦어서 못 갔지 뭘. 그래 그러면 우리 여기서 전망대 가자. 이름이 뭐였지? 사이공 스카이 덱이었나?"
"거기가 스까이 데-끄. 싸이공 스까-이 데끈가? 가세."
"정말요? 예쓰. 전망대 간다."
아들은 요즘 '좋아'라는 의미로 '예쓰'라고 외친다. 아버지는 '스까이 데-끄. 스까-이 데끄' 를 반복했다. 낮잠을 자고 에너지를 충전한 세 남자는 사이공의 야경을 한눈에 볼 생각에 들떴다.
사실 남산타워에 오르지 않았던 것은 매일 볼 수 있는 서울의 야경을 굳이 비싼 돈을 내면서 봐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호치민의 야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호치민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사이공 스카이 데크가 우리의 저녁 목적지로 결정되었다.
그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 담당인 내가 저녁으로 점찍어 둔 곳이 있었다. 전날 밤 혼자 밤거리를 걸으며 발견한 집이었다. 그랩 기사들이 배달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베트남식 샌드위치 반미를 파는 곳이었다. 베트남에 와서 이렇게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을 본 적이 없었다. 보자마자 내일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오리라 생각했었다.
'반미 후인호아? 그랩 기사들 줄 봐. 다 현지 사람들이 주문해서 먹는다는 거잖아. 이게 바로 찐 로컬이지. 진짜 현지인들이 사랑하는 집. 관광객들한테 유명한 곳이 아니잖아. 역시 여행은 길거리를 다니다 발견해야 해. 왜 한국사람들은 가는 곳만 가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버지, 아들, 내가 어제 봐둔 반미집이 있어요. 거기 가서 저녁 먹고 갑시다."
"아빠, 그런데 반미가 뭐예요?"
"바게트빵 알지? 그게 프랑스 빵인데 프랑스가 베트남 지배했을 때 바게트가 들어왔지. 그때부터 거기에다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거야."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반미를 먹어본 적이 없지만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음식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반미 가게에 갔다.
전날 밤만큼은 아니지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반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찐 로컬 맛집이구나 생각했다. 반미는 하나에 60,000동. 한국 돈으로 3,000원 정도였다. 우리는 반미 3개와 콜라를 콤보로 시켰다. 아들은 유리벽 안에서 반미를 포장하고 만드는 아저씨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게트빵이 오늘 파는 것이라니.
나는 장사가 잘 되는 집을 보면 습관적으로 이곳의 매출을 추정한다. 외식 사업을 할 때 몸에 밴 습관이다. 이 집은 분명 월 매출 억대를 넘을 것이다. 배달 기사들이 반미를 받아가는 매장과 일반 손님들이 받는 매장이 따로 있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바게트와 대기 줄의 추이를 보면 3,000원짜리 반미를 하루에 1,000개는 우습게 팔 것이다. 일 매출 3백만 원을 잡아도 월 1억이다. 거기에 대량 주문을 커버한다면 몇 억대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이 정도면 한국에 가져가 지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우리가 주문한 반미가 나왔다.
바삭한 바게트 빵 안에 큼직하게 슬라이스 된 여러 중류의 고기가 가득했다. 빠떼라는 녹진하고 고소한 고기 스프레드가 듬뿍 발라져 있었다. 안에는 아삭하고 새콤한 야채가 들어있고 원하는 만큼 더 넣어서 먹을 수 있도록 고수와 함께 제공됐다. 반미는 아들의 아래팔만큼 컸다. 서브웨이 샌드위치의 두 배는 되는 양이었다.
포장 고객이 더 많아 홀 안에 좌석이 많지는 않았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난 사람들이 있어 세 남자는 거대한 반미 세 개와 콜라를 들고 작고 높은 테이블에 앉았다. 진한 버터의 향을 맡으며 통유리 안에서 반미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다 맛을 볼 생각을 하니 우리 모두 마음이 급했다.
"반미가 진짜 엄청나네요. 엄청나. 먹어 봅시다."
"잘 먹겠습니다."
바게트는 두께도 엄청나서 웬만한 어른도 베어 먹기 힘든 사이즈였다. 사진 한 장을 찍기도 전에 아들이 반미를 베어 물었다. 아들은 입이 크다. 가족 중에 입 큰 사람이 별로 없는데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 1학년 짜리가 벌써 삶은 계란 하나를 통째로 넣고 여유 있게 우물거릴 만큼 입이 크다. 아들은 반미를 입에 한가득 넣고 엄지 손가락을 들었다. 입으로는 먹고 손으로 말하겠다는 표현이었다. 극찬. 윤기가 흐르는 부드러운 빠떼는 바게트의 바삭함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새콤한 야채를 듬뿍 올리니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버터의 고소한 풍미와 섞여 씹을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여기는 진짜 최고 반미네. 이런 거 프랑스에서 먹으려면 2만 원씩 내야 할 텐데 엄청나네. 내일도 이걸 먹어야겠다. 엄청난 곳을 찾았구먼. 잘했다."
"어제 걸어 다니다 보니까 여기에 베트남 사람들 배달해 먹는 줄이 엄청났어요. 여기는 무조건 찐로컬 맛집이다. 와야 된다 생각했는데 역시 다르네요."
그 와중에 아들은 계속 말이 없었다. 와그작 소리만 내며 맛에 집중하고 있었다.
맛을 소개하는 즐거움이 있다. 내가 찾은 식당에서 함께 온 사람들이 감탄할 때의 희열. 수많은 맛집 유튜버들이 있는데, 진정성이 느껴지는 사람은 소수다. '여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집이다. 구독자 여러분들이 이 맛을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가 진심인 사람들은 표정부터 다르다. 삼부자 원정대의 메뉴 담당인 나는 반미 후인호아에서 맛집 유튜버가 되어 100만 조회수를 달성한 듯한 기쁨을 느꼈다. 아버지가 50만, 아들이 50만.
그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반미 후인호아'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반미 맛집이라는 것을. 내일도 또 오려고 검색을 했다가 이 집이 유명 맛집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한국에서부터 알고 찾아간 차이일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모르는 현지 대박집을 찾은 줄 알고 우쭐했던 것이 민망했다. 그런데 아무렴 어떤가. 나는 발로 뛰어 맛집을 발굴했고, 그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그들이 행복해하며 먹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인과 어린이는 아빠가 베트남 최고의 샌드위치를 찾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여기가 원래 유명한 곳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