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올 것인가
통일궁은 호치민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대부분 들르는 곳이기에 다소 복잡하지만, 박물관을 둘러보듯 사색하며 찬찬히 둘러보면 좋은 곳이다.
베트남 통일궁은 여러 번 주인과 이름이 바뀐 베트남 현대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통일궁은 1873년에 프랑스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통일궁은 '노로돔 궁전'이라고 불렸다. 노로돔 궁전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던 1945년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지배하던 프랑스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53년 호치민 주석의 베트민이 프랑스를 몰아낸 후 노로돔 궁전은 '독립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기념했을 것이다. 1955년 사이공에 자유주의 노선의 베트남 공화국 (남 베트남)이 수립된 이후에는 대통령의 관저로 쓰였다. 1975년 호치민 주석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이 통일되면서는 다시 이름을 '통일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역사는 너무도 많이 닮았다. 두 나라 모두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중국대륙과 접해 언어적으로는 한자를 썼고, 정치적 영향권 아래 있었다. 큰 나라 중국에 사대의 예를 갖출 것이냐는 왕조 시대의 핵심 논쟁이었다. 1800년대 중반,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와 우리의 조선왕조는 이제 힘을 잃은 청나라 대신 각각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베트남과 한반도 모두 냉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 나라는 모두 남북으로 갈라져 이념의 대리전을 치렀다. 동족 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비극을 경험했다. 두 나라의 차이가 있다면, 베트남은 '통일궁'의 시대를 맞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선'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기독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는 한반도의 통일이 다가올 신의 섭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정치적 견해나 바라는 통일의 형태는 다르지만, 신의 뜻은 언제나 '화해'이고 '연합'이기 때문에 언젠가 우리 민족에게도 연합의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리고 20대 젊은이답게 몇 년의 열정을 그 분야에 바쳤다. 다가올 통일의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회사를 꿈꾸며 함께 창업을 했다. 북한산 농산물을 수입했고, 상품화해 남한에 소개했다. 한반도의 북쪽에도 최고급 자연농산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탈북한 청년들을 고용해 디저트 매장을 열었다. 북 출신 친구들은 요리를 했고, 서빙을 했다. 디저트 브랜드는 맛있기로 입소문을 탔고, 강남에서 나름 유명한 매장이 되었다. 백화점에 입점했고, 지점을 여럿 오픈했다. 연평도 포격 이후 경색된 남북 관계 하였지만, 북한의 어린이에게 신발을 보내는 프로젝트 등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때 나는 '휴전선'의 시대를 살며 '통일궁'을 바라봤던 것 같다. 물론 통일의 과정이 베트남과 같기를 바라진 않았다. 전쟁과 점령의 통일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통일이 오길 바랐다.
나의 선택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어머니는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모범생 인생을 살던 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할 시기에 갑자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업을 한다니 세상 어느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많이 가는 길 중에 선택해도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머니는 반대를 거듭하다 몸져누웠다. 나와는 몇 달간 말도 섞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도 역시 내 선택을 존중했다. 아버지의 침묵은 어머니의 격렬한 반대와 대비되었다. 그때만큼 아버지의 방임이 고마웠을 때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침묵으로 격려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나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지도 않을 통일을 꿈꾸며 맨 땅에 헤딩하듯 무일푼으로 사업 전선에 뛰어든 아들이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뒤, 부모님께 3년 계획을 프레젠테이션했다. 제발 아들을 믿어달라는 제스처였다. 침묵을 유지하던 아버지는 그 후, 나에게 힘을 주는 말들을 적극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요즘 시대에는 그렇게 큰 꿈도 꿔보고 해보고 싶은 경험도 해야 돼. 대기업 무슨 비전이 있겠니. 아빠도 봐라. 은행 평생 잘 다닐 줄 알았는데 IMF 와서 나왔잖아. 회사만 다니다 나오면 할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정말 좋은 선택을 한 거다. 탁월한 결정이다. 계속해봐라. 젊었을 때 해봐야 해. 너 같은 전문가는 나중에 통일부 장관으로 부를 거다. 네가 만든 그 북한에서 수입한 블루베리 주스 역시 좋더라. 이게 항산화 작용이구나. 눈이 확실히 덜 침침하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조금씩 아들의 뜻을 수용하며 고통 속에서 나왔다. 어느새 어머니는 내가 파는 주스와 디저트, 파스타와 커피를 가장 많이 팔고 소개하는 명예 영업이사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 당시 서로 다른 뜻을 품고서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동안 본인의 침묵 스타일을 버리고 격려의 물꼬를 트자, 마침내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통일의 시대'로 들어갔다.
그 이후 나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회계사가 되었으면 이 재미를 몰랐겠지. 대기업에 갔다면 종종 삶이 지루해 견디기 힘들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산다. 아버지는 이 여행에서도 여전히 나를 격려하고 세워준다.
"네가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었을 거다. 이렇게 훌륭한 곳들을 찾아주니까 여행이 최고로 즐거워지는 것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셋이 같이 오니까 얼마나 좋으냐. 아버지 프랑스 여행 갔을 때 혼자니까 식당에도 잘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세명이니까 벌써 딱 좋잖아. 네가 빨리빨리 찾아주니까 아주 좋다. 아버지는 베트남을 유튜브로 공부했지만 너는 상당한 경제 전문가니까 역시 보는 게 다르구나."
한반도에도 '통일궁'의 시대가 올까. 우리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적어도 우리 삼부자는 베트남에서 아버지 덕분에 매 순간 통일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