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이 역사로 기록될거야
사이공 동물원 바로 옆에 있는 베트남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베트남 역사박물관은 3만여 개의 국보급 역사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전쟁 박물관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코친차이나 시절 말기부터 현대의 전쟁 역사를 다룬다면, 이곳은 석기시대부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까지의 역사로 채워져 있다.
"아들, 여기는 호랑이 같은 건 없어.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엄청 옛날이야기부터 있는 곳이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아니요. 재미없어요. 너무 더워요. 아우. 땀이 많이 나요."
아들은 나의 교육적 의도가 담긴 미끼를 단칼에 잘랐다. 아들은 나를 닮아 땀이 많다. 아니 훨씬 많다. 아들의 머리는 방금 축구 시합을 마친 것처럼 젖어 있었다. 땀을 닦으라고 손에 쥐어 준 보라색 손수건도 이미 축축했다. 초초했다. 이 지루한 역사박물관을 과연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아들의 짜증이 올라오면 미련 없이 떠나리라 다짐했다.
현장에서 한국돈으로 4,000원을 내고 세 명분 표를 샀다. 역시 저렴했다. ’ 4,000원에 역사 여행이라니 싸네. 그런데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박물관은 아기자기한 중앙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건물이었다. 베트남은 어딜 가나 식물이 많았다. 한국에서 식물로 이 정도 조경을 하려면 꽤나 돈이 들어갈만한 느낌이었다.
화살표로 된 관람 순서 팻말을 따라갔다. 첫 전시실로 족히 100여 개는 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불상을 전시해 놓은 곳이 나왔다. 전시실은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고, 큐알코드로 관련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전시품 옆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된 설명도 잘 되어 있었다. 불상 전시실에는 30명쯤 되는 백인 중심의 관람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 프랑스 사람들인가 봐요. 불어 같은데요?"
“그러네. 불어가 맞다.”
들으면서도 긴가 민가 했는데 아버지가 확인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불어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열심히 듣지만 듣지 않는 척을 했다. 우리는 박물관 속 불어권역을 경유해 선사 베트남으로 향했다. 아들은 더위를 피해 대형 선풍기를 찾아서, 나는 아들의 걸음을 뒤따라서, 아버지는 내 걸음을 뒤따라서.
'1'이라 번호가 매겨진 다음 전시실부터 본격적인 베트남 역사 탐험이 시작됐다. 어느 나라나 그렇듯 역사의 시작엔 돌멩이로 불을 붙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선조 가족 중 남자는 창을 다듬고 있고, 여자는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두 아이는 발가벗고 아빠, 엄마를 돕고 있었다. 아들은 실물 크기의 모형을 하나씩 뜯어보며 유심히 관찰했다.
더위 먹은 강아지 같았던 아들의 눈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우리 세 남자는 우리로 치면 고조선과 비슷한 반랑과 어우락의 고대 역사를 지나, 서기 938년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의 천 년을 보았다. 한나라와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베트남은 민족의 계보를 이어갔다.
아들은 베트남 역사의 중요한 전투들을 만든 진흙 인형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위인전을 30번은 읽은 터라 해전의 모습들을 보고 아들은 할 말이 많았다.
"할아버지, 여기는 왜 배에 불이 붙었어요? 여기 이 병사는 나무에 찔렸는데 아프지 않을까요? 베트남 사람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웠어요?
"응 그렇지. 베트남 사람들은 용감하다. 중국이 그렇게 괴롭혔는데 막아내고 살아남은 거야. 여기로 가면 쩐 왕조가 나오는구먼. 쩐 왕조 다음에는 레 왕조가 나올 거야. 따이비엣, 따이비엣. 대단했다. 대단한 거야."
우리 일행의 가이드는 베트남 역사책을 몇 권 독파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를 직접 보며 연신 감탄이었다. 한국에서 책으로만 보던 역사의 유물들을 직접 보니 새삼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더 대단해 보였을까.
"아빠, 여기 구경할 거 더 구경하세요. 이런 것도 있어요. 근데 아빠, 이거는 메두사 같아요."
아들이 머리가 여러 개 달려있는 불상을 보고 말했다. 아들은 더위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 있게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을 거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아들은 베트남의 석기와 철기 유물들을 전시한 특별관을 헤집고 다니며 역사를 만끽했다. 우리는 레 왕조와 응우옌 왕조의 역사를 따라갔고, 프랑스가 다스리던 코친차이나 시대를 빠져나와 마침내 2023년의 베트남에 도착했다.
아들이 갑자기 툭 말을 꺼냈다.
"아빠, 저는 지금까지는 여기 역사박물관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진짜로?"
“신기한 게 많잖아요.”
“스카이덱 전망대보다 여기가 더 재미있다고?"
"네. 1번 방부터 16번 방까지 따라가면서 다 봤잖아요. 중간에 빼먹은 숫자도 없이요.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봤어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
베트남의 역사처럼 우리 삼부자의 역사도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70년 역사, 아빠의 40년 역사, 아들의 10년이 채 안 된 역사가 동시에. 한 순간도 안 빼놓고 다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