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손 잡아 줄게
오전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왔다. 동물원과 박물관을 소화했는데 아직 11시였다.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니 일정이 알뜰해졌다. 우리는 에덴스타 사이공 호텔을 떠나 여행의 후반부를 책임질 에어비앤비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나는 에어비앤비를 좋아한다. 우리 가족의 에어비앤비 역사는 아들이 막 걷기 시작한 7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2주짜리 장기근속 휴가와 남은 연차를 싹 긁어모아 한 달의 휴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18개월 된 아들을 품에 안고 아내와 함께 미국 동부를 일주했다.
미국 동부의 가장 북쪽 캐나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뉴햄프셔주에서 출발해 보스턴과 뉴욕을 찍고 필라델피아, 볼티모어를 거쳐 워싱턴 DC까지 내려오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일정 대부분을 에어비앤비에서 보냈다. 호텔에 묵을 예산이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한 달이나 타지에서 보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호텔에 갇혀 지내기 싫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에어비앤비의 캠페인 카피의 타깃이 딱 우리였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살아보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캐리어 하나에 카시트를 항상 들고 다녔다. 미국은 어린이가 카시트에 타지 않으면 단속이 심했다. 도시를 이동할 때면 전날 밤 렌터카 웹사이트에 접속해 소형차를 빌렸다. 미국 동부를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95번 국도를 탔다. 돈이 부족하면 터미널에 가 저렴한 버스를 탔다. 배가 고프면 어딘지 모를 동네로 빠져 햄버거를 먹었다.
살아보는 여행의 완성은 에어비앤비였다. 뉴욕에서는 뉴욕 양키스의 경기장이 있는 브롱스 남부에 있는 한 흑인 작곡가의 집에 묵었다. 그의 방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연필로 쓰인 악보가 벽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뮤지컬 곡을 많이 쓴다고 했다. 그의 집 앞에는 밤늦게까지 큰 소리로 떠드는 스페인어가 들렸으나 그것 또한 삶이었다. 그는 우리와 싱가포르 여행객에게 방을 내주고 1층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은 처음 보는 덩치 큰 흑인 아저씨를 신기해했다. 집 안에 계단이 있는 2층집도 신기해했다. 세상에 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필라델피아에서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 인도에서 온 지 5년쯤 된 부부의 집의 한 방에 묵었다. 어쩌다 미국에 왔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함께 갔다. 차가운 철판에 우유와 시럽, 과일을 넣고 이리저리 비비고 섞어 만드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 들리는 찰캉 대는 쇳끌 소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었다. 부부는 부업으로 막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언젠가 우리 아들처럼 귀여운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삶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 있는 선택과 도전은 다르지 않았다.
삼부자 베트남 원정대의 목표 역시 베트남을 느끼는 것이었으므로 호텔을 고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삼부자는 호스트를 만나 더 현실적인 베트남의 삶을 경험할 수 있을까. 결론을 말하면 그러지 못했다. 삼부자가 묵은 곳은 호스트의 집 방 한켠이 아닌 우리만 단독으로 쓰는 스튜디오였다. 그는 문의에 빠르고 친절하게 답하는 호스트였으나 집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스마트폰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우리는 호텔을 나와 베트남 사람의 집에 들어왔다. 그것으로 진일보다. '베트남의 1군 중심지에는 이런 시설을 가진 레지던스가 많구나. 이런 곳은 에어비앤비를 돌려 부수입을 얻기 좋겠구나. 월세가 백만 원 정도니 하루 십만 원에 돌리면 수익이 차액이 꽤 남겠구나.' 정도를 안 것만으로 소득이었다.
삼부자의 두 번째 숙소는 인민위원회 청사와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응웬훼 광장 끝자락에 있었다. 여행 후반부에는 1군을 벗어나 다른 지역을 가보자는 생각으로 위치를 잡았다. 이곳은 사이공강만 건너면 호치민의 떠오르는 개발지인 2군과 뚜득군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고, 아래쪽으로 가면 한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7군의 푸미흥 지역으로도 가기 용이했다. 여차하면 사이공 강에서 스피드 페리를 타고 호치민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갈 수도 있었다.
곳곳에 골드로 포인트 한 마감재로 인테리어 된 널찍한 로비에 들어서자 노인과 어린이의 탄성이 시작됐다.
"아빠, 여기 진짜 시원해요. 여기 소파에서 그냥 누워서 쉴래요."
"여기가 에어비앤비인가. 호텔보다 더 좋구먼. 여기가 얼마라고 했지?"
"십만 원 안 돼요. 우리 1박에 다 그 정도로만 했어요. 십만 원에 이 정도 숙소면 괜찮네요."
우리는 호스트가 카드키를 넣어 두었다는 우편함을 못 찾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건물의 보안 요원은 에어비앤비 손님이 익숙한 듯 몇 호인지 보여달라고 하더니 우리에게 우편함과 키를 찾아 주었다.
"땡큐"
아들이 인사했다. 아들은 이제 땡큐 정도는 하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했다. 외국에선 땡큐를 했을 때 돌아오는 표정이 더 밝다는 것을 알았을 테지. 보안 요원도 어린이의 땡큐에 건치 미소로 화답했다. 다음엔 베트남어로 '깜 언'이라고 해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키를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오니 만족도는 더 컸다. 바로 입주해서 살아도 될 만큼 가구와 전자기기가 잘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호텔방에 처음 들어갈 때 느껴지는 특유의 낯섦이 없었다. 누군가의 깨끗한 집 느낌이 났다. '그래 이게 에어비앤비의 편안함이지' 라 생각했다. 우리는 조식을 포기한 대신 집에 온 느낌을 얻었다.
"아들, 여기는 에어비앤비라 조식은 없어. 그러니까 이따 밤에 들어올 때 내일 아침에 먹고 싶은 걸 사 오자."
"조식이 없다고요? 먹고 싶은데... 그럼 수영장은요?"
"수영장은 있지. 당연히 있지. 여기 옥상에 수영장 있어. 가볼까?"
"네, 지금 당장이요. 예이! 수영장 있다."
다행이었다. 이곳의 옥상에도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장마저 없었으면 아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뻔했다. 우리는 옥상의 수영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동물의 왕국과 남 비엣 왕조로 너무 먼 여행을 다녀온 여파로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이제 삼부자는 서로의 페이스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건치 보안 요원의 도움을 받아 17층에 위치한 수영장으로 올라갔다. 지난 호텔 수영장보다 크기도 세 배는 됐다. 무엇보다 수영장은 삼면이 뚫려있었다.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호텔 이후로 세계적 붐이라는 인피니티 풀 스타일이었다. 물에 들어가 시야를 멀리 두면 수영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착시가 일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멋진 수영장은 수영에 심취한 아들의 영혼까지 사로잡았다. 아들과 나는 두 시간을 넘게 수영을 했다. 아들은 아직 자유형을 할 수 없으니 물속에 머리를 넣었다 뺐다를 했다. 잠수해서 몇 초를 셀 수 있는지 시합을 했고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면 밖으로 들리는지 실험을 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는 몇 번만에 갈 수 있는지를 봤다. (어차피 나는 수영하면서 숨 쉬는 방법을 몰라서 물속에서 숨을 참고 갈 수밖에 없다.) 60cm짜리 어린이풀과 성인용풀 사이에 있는 식물 뒤에 숨어 숨바꼭질을 했고, 물안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가락으로 줍기 놀이를 했다. 수영을 할 줄도 모르는 두 남자가 두 시간 동안 수영장에서 놀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 부자는 물 안에서 한 뼘 더 친해졌다. 이 시간만큼은 나도 아들과 '놀아주지' 않고, 그냥 아들과 함께 놀았다. 베트남 물 참 좋았다.
물 안에서 놀거리는 아직도 무궁무진했으나, 배가 고팠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물에서 나왔고, 휴식을 취한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세 남자는 이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찐 로컬 식당은 도전하는 것,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걷다가 만나는 것.
숙소를 나와 큰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배가 고파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할 틈이 없었다. 길 가다 만난 현지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다.
맛집을 찾아갔으면 이런 식당을 경험해 볼 수 있었을까. 이곳은 몇 가지 반찬을 골라 주문하면 밥과 함께 담아주는 곳이었다. 물론 찐 로컬 식당의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을 것, 베트남 사람들 외에 관광객은 없을 것.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주문은 손가락이 가장 정확했다. 반찬들이 담긴 쇼케이스 앞에 서서 정확하게 찍어 주면 됐다.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 정체 모를 양념 고기와 푸석푸석한 닭찜, 급식에서 많이 봤던 푸르스름한 계란찜, 새콤한 베트남식 나물 같은 것을 받았다. 상호를 검색해 보니 몇 곳이 더 나오는 걸로 봐서 이곳은 베트남의 김밥천국 같은 곳인가 싶었다. 별점 3.2짜리 식당에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노인에게나 어린이에게나 시장이 반찬인 건 똑같다.
그렇게 찐 로컬 식당 또 한 곳을 접수하고 나와 우리는 밤거리를 걸었다. 반짝이는 조명이 빛나는 시청을 지나 응웬훼 광장을 걸었다. 사이공 사람 다 나온 것 같았던 주말 밤과는 다르게 월요일 밤 응웬훼 광장은 조용했다. 우리는 3,000원짜리 밥을 이미 먹었지만 5,000원이나 하는 닭다리 꼬치를 또 사 먹었다. 현지인 대상 식당과 관광객을 상대하는 음식의 가격은 그 정도로 달랐다.
베트남에 온 뒤 사람이 없는 밤거리를 처음 봤다. 사람이 사라지면 생각이 찾아온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 두 남자와 이곳에 있을까.'
글쎄 답은 모르겠다. 왜 내가 베트남에 있는지. 나를 키운 지공 노인은 왜 내 오른쪽에서 걷고 있는지, 내가 키울 어린이는 왜 내 왼쪽에서 걷고 있는지. 나에게 그날의 답을 알려줄 것은 내가 선택하고 만들 미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호랑이와 인사하느라, 박물관을 누비느라, 두 시간 수영을 하느라, 걷고 또 걷느라 나는 더 이상은 못 걷겠다며 짜증을 내는 울부짖는 아들의 손을 잡고 어떻게든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오래전 좋아했던 노래 하나가 생각났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내가 너의 손 잡아 줄게.'
그렇게 손 잡고 힘든 세상 같이 살아가다 보면, 내가 왜 두 남자와 함께 베트남에 있었는지도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