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추워졌다.
갑자기 뚝 떨어진 어느 겨울의 날씨처럼 아니 그 보다 더 추워졌다.
잘 볼 줄 알았던 시험에서 시원하게 실패하고,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나는 문득 외로워졌다.
마음이 추워지자 진짜 몸도 추워졌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영혼까지 따뜻해져 기운을 차릴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가 먹고 싶어 졌다.
1. 육수 만들기
수제비는 육수가 90프로이다. 육수는 수제비의 바탕인 도화지가 된다.
하얀 바탕을 가지면 하얀 수제비가, 빨간 바탕을 가지면 빨간 수제비가 된다.
나는 무엇을 넣고 만들어진 바탕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도화지는 무슨 색일까?
나는 멸치육수에 깔끔한 바탕을 선택했다. 다 때려 넣자. 무도 맘껏 넣고, 다시마도 넣고, 쓰다 남은 파도 모아놨다 넣는다. 양파도 요리에 필요할 땐 예쁘게 썰고, 그 남은 토막들 모아놨다 넣는다. 냉동실에 넣어둔 표고버섯 밑동도 넣고. 제일 중요한 멸치도 머리 떼고 손질해서 퐁당퐁당 넣는다. 다진 마늘 한 스푼을 넣고 계속 끓인다. 국간장도 휘휘 넣어 간을 대략 맞춘다. 그리고는 그냥 하염없이 끓인다. 육수는 끓일수록 깊은 맛을 낸다.
인생을 수제비 레시피에 비유하자면, 난 육수를 내고 있는 중이다.
아직 맛이 모자라서 이것저것 더 넣어가며 보글보글 끓으려 준비 중이다.
무엇을 더 넣어야 맛있는 수제비가 될 수 있을까?
2. 반죽하기
육수가 끓는 동안 밀가루를 꺼내 반죽을 한다. 어디서 들은 건 많아서 밀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고 치댄다. 뜨거운 물을 넣으려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육수가 보인다. 육수 한국자를 퍼다 넣는다. 뜨거우니 믹서기라는 기계의 힘을 빌려본다. 위잉 소리 몇 번에 반죽은 금세 밀가루의 가루 가루에서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넣는 물 양에 따라 반죽은 끈적끈적 해지기도 반대로 퍽퍽해지기도 한다.
인생이 반죽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꼭 물의 양을 잘 맞추어야 한다.
물을 너무 많이 부어 여기저기 묻히고 지저분하고 질척거리는 반죽이 될지, 아님 깔끔하고 깨끗한 적당한 농도의 반죽이 될지.
이제 적당한 농도의 반죽을 비닐봉지에 넣고 냉장고에 재운다. 자장자장 잘도잔다.
3. 수제비에 넣을 토핑 준비
수제비에 넣을 것들을 미리 썰어놓는다.
수제비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수제비의 이름이 달라진다.
매우 작은 양으로 수제비를 대표하게 된다.
감자를 넣으면 감자수제비. 바지락을 넣으면 바지락 수제비. 김치를 넣으면 김치 수제비.
작은 능력이지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바지락과 호박을 넣기로 했다. 예전에 사놓은 바지락살을 냉동실에서 꺼내 두고 호박을 가지런히 잘랐다. 달달한 양파와 색이 예쁜 당근도 같이 가지런히 채 썰어 준비한다.
4. 앞서 준비한 재료 넣어 완성하기
이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서 육수 재료들을 건져내고 하나씩 넣어 완성시킨다.
촘촘한 채반을 이용해 육수 속 재료들을 깔끔히 건져낸다.
여기서 깔끔히 건져내지 않으면 씁쓸한 맛이 추가된다. 그러니 잘 건져 내야 한다.
육수 속 재료들은 그렇게 맛을 내고 사라진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건져낸 맑은 육수 속에 토핑으로 준비한 바지락과 호박, 양파 그리고 당근을 넣는다. 한 소큼 끓여내고 나면 자고 있던 반죽을 깨운다. 반죽을 열어 먹기 좋은 크기로 떼어 내 냄비 속으로 던져 넣는다. 퐁당퐁당. 반죽은 너무 크면 안 익어 밀가루 맛이 나고 너무 작으면 풀어져 흩어진다. 손가락으로 똑똑 떼어내 얇게 눌러 넣는다. 손이 뜨거워져도 재주껏 넣어야 한다.
수제비 밀가루 반죽이 하나씩 둘씩 떠오르면 익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제 하나를 맛보고 간도 맞춘다. 국간장을 더 넣어야겠다.
여기서부턴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강대강 눈대중이 아니라 먹어보고 싱거우면 국간장 조금 더. 반죽을 먹어보고 덜 익었으면 조금 더 끓이고. 그렇게 하나하나 체크해 가며 요리를 완성시켜야 한다.
인생도 마지막 레시피 단계로 도달할수록,
나이가 먹어갈수록 모든 일에 세심하고 꼼꼼하게 보고, 작게 작게 하루를 내디뎌야 하나보다.
육수 낼 때처럼 과감하게 왕창 넣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맛이 된다.
무슨 일이든 마지막일수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뜨끈한 맛있는 수제비가 된다.
이제 먹자. 영혼까지 따뜻해질 수는 없지만 몸이 따뜻해지는 정성스러운 수제비를 먹을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