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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안후라이안 Aug 17. 2020

브래지어와 페호 사이에서

페미니즘 말고 피메일리즘 4

페트로니우스는 그걸 입고 싶지 않았다. 소년들은 그것이 끔찍하고 불편했다. 페니스를 그 바보 같은 상자 속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5사이즈에 B튜브를 해야 할 것인가, 6사이즈에 A튜브를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페니스를 갖고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양 그의 치수를 재면서 의논할 것이다.


상상해본 적 있으신가요? 여성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남성은 페호(peho,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와 스커트를 입고 수줍게 서 있는 모습을요.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상상으로 만든 나라 '이갈리아'에서는 여성이 일하고 남성이 집안일을 돌봅니다. 네, 맞습니다. 이 책은 <이갈리아의 딸들>입니다.


브란튼베르그는 남성을 칭하는 단어(man)가 곧 사람을 지칭하고, 여성을 일컫는 단어(woman)는 남성(man)에서 파생하는 부조리함을 비틀어 보여줍니다. 비슷한 예로, 역사(history)는 여성이 쏙 빠진 '그의 이야기'입니다(우리나라에는 이런 단어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갈리아에서 여성은 움(wom)이고, 남성은 움에서 파생한 맨움(manwom)입니다. 여성(움) 지배적인 사회에서 남성(맨움)이 해방운동을 벌이는 과정이 적혀 있습니다.



이갈리아에서 남성(맨움)이 페호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 현실에서, 여성은 왜 브래지어를 해야만 할까요?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한 건 아닐까요? 흡습성이 떨어지는 소재는 피부 알레르기를 유발하고, 조이고 답답해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데 말예요. 모양을 잡아주기 위한 이유라면, 브래지어와 가슴 처짐에는 관련이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가장 가볍게 접근하기 좋은 자료는 2009년에 방영된 <SBS 스페셜, 브래지어 하고 계세요?>입니다).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밖에 나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성은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여성을 보고 민망하다 여기죠. 남성의 가슴은 전부 드러내도 '야'하거나 '민망'하지 않지만 여성의 가슴은 그저 윤곽이 살짝 드러날 뿐인데도 '야'하고 '민망'하다고들 합니다. 왜일까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 이미지로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성적 대상화(性的 對象化, Sexual objectification)라 합니다.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여성과 남성이 뒤바뀐 소설이니 이곳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이들은 응당 남성, 맨움입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남성이 페호를 착용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우스꽝스러운 만큼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현실 또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소설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봐야겠습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작품. 왼쪽은 <골콩드(Golconde)>, 1953, 오른쪽은 <이미지의 반역(The Treachery of Images)>, 1929


제가 좋아하는 미술 용어 중에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해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하던 기법입니다. 물고기는 물 밖에 있고, 새는 나무처럼 땅에 붙박여 자랍니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합니다. 우리가 늘 봐왔던 평범함을 비틀며 낯설게 보라고 재촉합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좀 거꾸로 보자고요.


20대 때 처음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었을 때는 그저 유쾌하고 통쾌하기만 했습니다. 순결 사탕을 쥐어주며 평생 순결할 것을 맹세하게 하던 중학교, 이화여대 권장 도서라며 <주홍 글씨>와 <테스>를 굵은 글씨로 처리해서 전교생에게 전달하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진절머리가 났던 터였거든요. 한데 30대에 다시 읽은 <이갈리아의 딸들>은 불편했습니다. 뱃사람이 되고 싶지만 맨움(남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주인공 페트로니우스, 강간당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모두 잊자. 그게 더 나아. 더럽혀진 맨움을 누가 원하겠니?"라고 말하는 엄마는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여성과 아버지의 이야기니까요.


여성과 남성이 뒤바뀐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는 여성은 아마 저처럼 통쾌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낄 겁니다. 이 책을 읽는 남성도 불편함을 느낄 겁니다. 기억해주세요. 남성이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는 잠깐 동안 겪는 불편함은 여성이 평생을 살아가며 겪는 감정이란 걸요.


제가, 혹은 <이갈리아의 딸들>이 남성으로부터의 투쟁과 착취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다음 글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가부장제 사회가 생각보다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단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싸워 얻고자 하는 것은 통합과 평등이었다."




남자가 위대하다면 여자는 거룩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딸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니까!



위의 인용문은 엘리자베스 M. 토마스의 소설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가져왔습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작가가 구석기시대 여성 야난의 삶을 그린 소설입니다. 여성은 어째서 오두막에 머무르게 되었는지, 남성은 어째서 사냥을 나가고 오두막을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통찰하고 있습니다. 야난이 딸에서 여성이 되고, 다시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처절하고 눈물겹습니다. 세상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죠.


야난은 진취적인 여성입니다. 부모님을 잃고 동생과 살아남기 위해 남성들의 사냥을 돕고, 자립하기 위해 무리에서 이탈하고 늑대와 합류해 생활하기도 합니다. 이토록 주체적인 여성 야난이 아이를 낳기 위해 다시 무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당황스럽습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여성이 다시 약해지는 이유인 걸까, 하는 의구심도 생깁니다.


아이를 출산하고 삶을 이어가는 과정은 모질기만 합니다. 이게 바로 여성과 남성이 협력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은 한 사회를 지탱하는 과정으로까지 나아가니까요. 사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변화합니다. 이 변화에 제대로 발맞추지 못하는 요즘은 미래로 나아가는 걸음이 조금은 더뎌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언제나 그래왔듯, 여성과 남성이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진척시키고 있으며, 그렇게 천천히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 사족을 덧붙이자면, 여성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우리말 '그녀'는 소설가 김동인이 만들어냈습니다. 1919년 발표된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 처음으로 '그'와 '그녀'가 등장한 것이죠. 제 글을 꾸준히 읽어오신 분이라면 파악하셨을 수도 있는데, 저는 '그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쓸 수 있으니까요.


* "성적 정체성은 계급 정체성보다 훨씬 더 중요해. 사실 우리는 맨움에 대해서보다 노동자 계급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중략) 노동자 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보다 맨움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지독하고 극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성적 억압이 계급 억압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극심하기 때문일 거야. 만일 우리가 전 시대에 살았던 맨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보통 주석을 보거나 행간을 읽어야 해."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계급 간 불평등보다 성별 간 불평등이 더 쉽게 간과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미국 대통령에 버락 오바마가 당선된 것을 두고 인종 차별이 완화되었다는 증거로 꼽기도 하는데요, 반면 힐러리 클린턴의 낙선에서는 사회의 깨지지 않는 여성 차별을 읽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 여성과 남성이 화해할 방법에 대해 적어보겠다고, 지난 글에서 예고해놓고는 '낯설게 보기'와 '여성과 남성이 협력하는 사회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말았네요. 다음 글에서는 꼭(!) 화해법을 적겠습니다. 쓰고 싶은 다른 소재가 많아서 페미니즘과 피메일리즘에 대한 글은 다음번에 마무리지어야겠어요!


* 혹여 제 글을 기다리신 분이 있다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시작한 봉사활동에 맥을 못 추었는데 이제 내일이면 마무리지을 수 있을 듯합니다. "겨울나무" 선생님처럼 성실하게 써보겠다고 또다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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