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좀 억울하고 좀 행복해
꽃을 보는 이유
작은 것을 좋아하니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게 된다. 그래도 가끔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생각지 못한 무엇이든 받고 싶기도 하다. 오늘 내가 받아야 할 선물이 있다면 좋겠다. 병원에 입원했으니 병문안을 와달라고 기별을 하고 싶었다.
같은 상처를 다시 치료하고 있다. 한 번 붙여놓으면 잘 벗겨지지 않는 벽지처럼 완벽하게 덮어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테이프로 붙여놓은 광고전단지처럼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마흔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상처가 또 슬그머니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슬픔은 친정 엄마도 모른다. 혼자만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허함은 잘 입지 않은 옷처럼 버리지도 못하고 잘 찾지도 않는다. 그냥 정리박스 속에 담긴 채 같은 자리에 머문다. 갑자기 꼬리를 물고 기억하는 데로 나는 어딘가로 끌려간다. 다시 상자 속을 들춰서 꺼내는 일은 하기 싫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도피를 선택했다. 여름의 태양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시들어 가는 꽃들 사이로 새로운 꽃이 보였다. 문득 같은 상처지만 똑같이 아프긴 싫었다. 같은 곳을 부딪쳤는데 처음보다는 멍이 덜한 것 같다. 못 보던 꽃들이 반겨주니 상처는 아프지 않은 듯 평소처럼 돌아왔다.
누군가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길을 묻는다. 무겁게 붙어 입이 열리지 않을 것 같더니, 내 목소리는 바로 대답하고 있었다.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위로를 받은 것일까? 간절한 표정으로 길을 묻는 낯선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더니 쓸모 있는 사람이 된 듯했다.
산책을 나온 듯 걸었지만 나도 길을 잃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못하고 무작정 걷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다시 꽃이 내게 말을 건넨다.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면 어느 길로 걷든 상관없잖니? 그럼 꼭 갈 곳을 정해놓지 않아도 될 거야. 어디든!
새롭게 핀 원추리꽃 두송이 책상으로 돌아와 하얀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난 노트 속으로 들어가 펜을 지팡이처럼 한 손에 들고 걸었다. 그래서일까? 노트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저절로 글이 써지는 손을 갖고 싶다. 글을 쓰다 보면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 모습을 한 소녀가 나타난다.
내가 같은 상처로 아픈 건 쓰레기에서 풍기는 냄새와 비슷했다. 얼마 전 만난 쓰레기 더미의 원추리가 두 송이로 반갑게 웃어주었다.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지만 꽃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이다. 꽃은 자신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냄새가 난다고 그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꽃이 피지 않았다면 나는 모른 채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도 꽃은 핀다.
저절로 써지는 손은 가질 수 없다. 지팡이를 잡고 걸어야 하지만, 지금 쓰지 않으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은 좀 억울하지만, 꽃을 보면 좀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