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약속하기 - 믿을 수 있나요?

저는 믿어요. 순간만이 영원하기 때문에.

by 얼떨결정

내게 서로가 선택해서 하는 이별은 그다지 슬픈 일이 아니다. 정말로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면 헤어질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사랑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하는 이별은 어린 내 기억에 선명히 담겨있다. 중학교 3학년, 엄마가 죽었다. 고3이 되자, 나를 부모 대신 키워주셨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신 줄도 모르다가 장례식에 불려 갔다. 두 죽음을 연달아 겪으면서,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누군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이미 중학교 3학년 때 배웠는데, 왜 할아버지가 죽을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내가 가족에게 배운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교훈이었다. 얼마나 사랑하든지와 무관하게, 나도 원하지 않고 상대방도 원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상처로 남을까? 모두가 겪는 일인데도? 그냥 큰 슬픔인 거 아닐까? 아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처였다. 내가 고인에게 충분히 잘해주지 못한 기억들은 나를 계속해서 헤집었다.


아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아주 큰 고통도 줄 수 있는 사이라는 걸 의미했다. 가까울수록 더 크게 상처 입힐 수 있다. 관계가 가까워질 때마다 상대를 은연중에 멀리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 그 변덕에 지친 사람들이 관계를 끝내거나, 혹은 내가 관계가 끝날 게 두려워 먼저 끝냈다. 이 두려움은 분명 너무 가까워지면 헤어질 때가 두려운 것과 유사했다. 한편으론 더 깊은 공포와 연결되어 있었다. 반드시 상처받게 될 것이다라는 직감이 내게는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애인이 연락이 안 되면, 나는 상대가 화가 난 것보다는 어디서 사고를 당했을까 봐 두려웠다.


내게 엄마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기에, 이 모든 생각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암 수술을 마친 아버지 손을 잡고 입원실 병동을 걸을 때 깨달았다. 걸어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천천히 걷던 그 복도길에서 병원 냄새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가 이미 중학교 3학년 때 배운 것과 같았다. 이 세상에서 돈이나 성공이나, 성취, 남 보기에 좋은 이름 같은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큰 병원 로비에서 엄마 손에 붙들린 환자복을 입은 아이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세상에 대부분의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들일 뿐이다.


친구가 오랜 기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힘들어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죽은 거보다 낫지 않냐고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힘들면 그냥 죽었다 생각하라고 했다. 친구는 이런 위로는 처음 들어본다고 했지만, 울면서도 피식하고 웃었다. 헤어질 때 인사를 잘 나누었는지, 서로 마지막 말을 나누었는지 물으며 서로 행복을 빌어주며 마무리했다면 다 괜찮다고, 사실 쌍욕하며 헤어졌어도 괜찮다고 다독였다. 사랑하는 데 정말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고려할 때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아서 헤어지다니, 다행스러운 이별이다.


누군가 내게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을 흔쾌히 믿어주었다. 그 말을 뱉는 진심을 믿고, 동시에 영원한 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순간이 가장 소중하며, 이미 그 말을 뱉고, 듣는 순간만으로도 영원하다. 다른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고, 영원한 순간에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우정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친하고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이 서로를 위했지만 멀어지는 친구들을 바라보면서도 아쉽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건 영원 같은 순간들이었고, 그렇다면 바로 그게 영원하다는 뜻이었다. 순간만이 영원하다.




브런치북 『그 흔한 생존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연재됩니다.

이번이 4부 「외로워도 함께」의 마지막 편입니다. 다음부터는 마지막 5부 「들릴 때까지 외치는」을 시작합니다. 글의 제목은 예고된 목차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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