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떨결정 Jul 24. 2023

울어야 할 때 울기만 할 수 있다면 상담이 끝난다.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네 번째 상담을 다녀왔다.


아빠의 암 진단 소식을 듣고 제 발로 집 근처 상담센터를 찾아갔다. 아빠가 아픈데 엄마 생각이 자주 나서, 내가 병원에서 죽는 것과 나머지 죽음을 비교하는 것이 느껴져서. 그러면서도 암 환자들의 자살률을 검색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불안해하며 상담을 받을까 고민했다. 주말을 넘기고 월요일, 일을 하다가 일에 집중을 전혀 하지 못하길래 집 근처 가장 가까운 상담센터에 전화를 했다. 미안한데, 오늘 좀 해주면 좋겠다는 내 말에 상담사는 그러자고 했다.


울면서도 농담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웃는 나를 보며 상담 선생님은 ‘웃을 때 웃고, 울 때 울기만 하면 상담이 마무리될 거예요’라고 네 번째 상담에서 말했다. 상담 선생님이 두 번째 상담 때 다음번 상담에 오기 전까지 생각해 보라 한 상담을 통해 얻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는 다시 나누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가 자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따위의 이뤄지지 않을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이유로 죽었으면 괜찮았을 것도 아니면서, 그건 그거대로 다른 어려움을 내게 주었겠지.


나의 말하기 태도와 비언어적 표현들이 가까운 이들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공감을 가로막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스럽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럴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아무 일도 아닌 척 말하기를 잘했다. 중1이었나,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말하는 내게 어떤 친구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마라고 했다. 그때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혼한 사람은 많은데 그게 뭐 어때서란 식이였다. 그 친구는 그게 마음이 아팠을까?


엄마의 죽음에 대해서 주변에 이야기하게 된 이후 나와 내 친구들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주 소리 내서 웃었다. 그게 좋았다. 우린 울면서도 웃는 소리를 자주 냈는데, 실제로 심각한 상황에서 하는 농담은 대부분 정말 웃기다. 웃다가 뭐 그런 거지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상담선생님은 내가 남 이야기 하듯 내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벌써 약 40만 원가량을 썼다. 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저 이제 과거와 달리 돈을 버는 직장인이고, 예전처럼 돈 걱정을 하지 않는다. 상담사가 이제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다시 상담을 받게 된 거라고 했다. 그런 것 같다.


첫 번째는 살아온 삶 이야기하기.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자살과 할아버지의 죽음과 돈 없음.

두 번째는 아빠의 암 진단에 대한 나의 불안한 마음들.

세 번째는 내가 느낀 서럽고 속상한 것들. 그간 겪었던 일들의 사소한 어떤 장면들.

네 번째는 나의 통제하려는 강박과 분석/연구하는 습관(상담사가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굳이 이름 붙이자면 방어기제로서 주지화 같은 것).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아주 많은 정보를 알아보고, 미리 대비하려고 하는 것이 내 현재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 예전에도 그랬다. 때때로 내 삶에서 좋은 성취를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나, 일상을 피폐하게 할 정도로 과해지기도 한다. 최악의 상황도 늘 가정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상담 선생님은 우선 자각하면 중단하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상담 선생님은 그때 가서 대처해도 늦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그때 가서 대처하면 늦을 거고, 정확히는 어차피 준비해 봤자 준비하지 않은 일은 생긴다에 가까운 것 같다. 생에 미리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언제나 늘 갑작스럽게 생긴다. 우리는 매일매일이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만 내일 내게 혹은 다른 가까운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번 상담들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었다.

아빠가 수술 후 요양병원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더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고, 아빠와 처음으로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남편에게도 조금이나마 더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상담사가 하라는 걸 나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했다. 그 효과가 상담사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게 돌아왔는지는 모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처도 받았다.


끝날 때까지 좀 더 도움이 되겠지. 아마도 그럴 거다. 이번 상담 선생님은 과거에 만났던 선생님들 대비 목소리 톤이 좀 낮은데, 그게 마음에 든다. 안타까워할 때 목소리가 덜 거슬린다. 좀 더 단호하게 내 주변 어른들이 내게 해줬어야 하는 데 그러지 않았던 것들을 짚어서 굳이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 역시 마음에 든다. 내가 해야 할 것들도 더 강하게 말한다.


요즘은 내가 잘 자랐다는 사실 자체가 화가 난다. 내가 무기력한 것이 느껴진다. 예전의 오래된 기억들이 또 다시금 억울하고 서럽다. 그리고 그 사이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 여전히 나 자신이 싫다.


아빠가 암진단을 받고 수술받기까지 내가 이렇게 생에 감사함을 많이 느끼는 인간인지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했다. 삶의 소중함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는 건 번거롭고 지겹고, 눈 감으면 다시 눈 뜰 거라는 사실이 갑갑했다. 구겨져서 사라지고 싶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이 생각을 안 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가끔 이런 순간에 결론이 이 결론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올까? 태어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는 날이 올까?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지 않는 게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나는 어떤 내가 되고 싶나?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잘 사는 나 말고 겪은 적이 없는 나.

내가 바라는 게 이거라는 게 어이가 없어서 여전히 내가 싫었다. 수용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지겹다.


시계를 본다. 나는 해가 진후부터 해가 뜨기 전 사이 어두운 시간에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제 없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