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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Oct 27. 2024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일단 여행을 떠나 보자


마흔이 됐다. 이제부터는 정말 노후준비를 시작해야한다고 다들 걱정하는 나이. 당장 다음 달 수입이 얼마나 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그러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작은 자유 정도는 있는 프리랜서의 삶.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일단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늙어서 살고 싶은 나라들’로. 주변의 반응은 반반. 내 또래들은 경악하거나, 혹은 정말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노후계획이야!?’ 열 살 이상 어린 동생들은 환호성부터 질렀다. ‘언니 너무 멋진 생각이에요!’ 상반된 반응을 전해들은 어르신들은 혀부터 찼다. ‘아이고, 언제 철 들래.’


꿈의 확장


그러니까 이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사는 ‘3개월씩 사는 꿈’의 ‘확장판’이다. 올해부터 나는 ‘늙어서 살고 싶은 곳’으로 매년 여행을 떠난다. 여건이 되는 대로, 어느 해는 겨울에, 어느 해는 여름에, 또 어느 해는 봄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사계절을 모두 다른 나라에서 보내는, ‘3개월씩 사는 꿈’이 마침내 실현되는 해도 오겠지. 그렇게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늙어서 내 마음 뉘일 곳이 어디인지를.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말했다. ‘완전 F네. T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계획이야! 비자는? 영주권은? 자금은? 살고 싶다고 다 가서 살 수 있어?’ ‘현실적인 여건들은 살아보면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러다 확신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차근차근 실현되도록 만들어야지.’


아직은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흐르고 싶어


한 쪽에서는 네 발등에 지금 불이 떨어져있는 것을 모르냐며 이제라도 어서 빨리 안정적인 사회의 시스템에 속해야한다고 내 등을 떠밀고,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백세시대’와 ‘아모르파티’를 부르짖으며 넌 아직 젊으니 좀 더 파티를 즐기라며 내 목에 화환을 걸어준다. ‘프리랜서’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동경하던 어린 시절엔 마흔이면 인생을 전부 통달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십 대와 삼십 대보다도 더한 혼돈이 나를 흔들어대는 속에서 내가 택한 건, 결국 내 내면이라는 나를 지속하는 무게추를 붙잡는 것이었다. 내가 계획한 건 ‘늙어서 살 곳을 찾는 여행’이지만, 그 속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여다보고 있는 건, ‘여행갈 곳의 지도’가 아니라, ‘지금의 내 마음 속’이었다. 그리하여,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계획하는 건, 결국,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현재’에 대해서 먼저 말하는 것이었다.


한 계절은 살아봐야지


고작 ‘한 달’ 가지고 늙어서 살 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겠어? 적어도 ‘한 계절’은 살아봐야지. 그렇게 뚝딱 첫 여행의 기간이 정해졌다. 석 달, 12주. 한국에서 내가 가장 피하고픈 계절인, 살을 에는 겨울이 첫 여행의 계절이 되었다. ‘추운 겨울은 무조건 따뜻한 나라에서’의 법칙을 따라, 태양이 작열하는 남쪽나라, 태국이 제일 먼저 후보에 올랐다. 굳이 ‘늙어서’를 가정해보지 않아도 대도시의 번잡함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터라, 규모가 있는 도시들은 피하기로 했다. 곧바로 머릿속에 선명히 목적지가 떠올랐다. 태국 북부의 산간지역, 떠오르는 ‘예술가들의 집결지’이자 ‘디지털노마드들의 성지’라 불리는 ‘치앙마이’. 어느 겨울 여행했던 따뜻한 지중해의 바닷가마을들도 눈앞을 스쳐지나갔지만, 어쨌든 최종결정은 지갑이 하는 것. 지금보다 벌이가 나아지고 통장잔고도 훨씬 넉넉해지면 그땐 겨울의 지중해로도 떠나보자. 마음속에 지중해의 태양을 품어두고서, 첫 여행은 가장 ‘감당 가능한’ 곳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결정을 끝낸 2022년 여름, 한 비행사가 ‘겨울특가’ 행사를 시작했고, 운 좋게도 생각했던 예산의 절반 정도 되는 가격에 왕복항공권을 구입했다.


첫 밤공기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2월의 어느 날, 까만 겨울밤을 화려하게 수놓은 도시의 일루미네이션을 뒤로하고 치앙마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자마자 여느 때처럼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여름이었다. 곧 도착한다는 기장의 안내를 들으며 반팔 티셔츠 위에 입고 있던 니트조끼를 벗었다. 공항은 작았고, 금세 수하물로 맡겼던 여행가방을 찾았다. 와이파이를 연결해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 픽업요청메시지를 보냈다. 5분 안에 도착한다는 차를 기다리며 반팔티셔츠 안에 입고 있던 긴팔가디건도 벗었다. 치앙마이는 산간지역이라 해가 지면 제법 춥다고 들었는데, 여름은 여름이구나. 구름 위에 떠있는 몇 시간 동안, 겨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더 이상 시리지 않은, 낮의 열기가 후덥지근하게 녹아있는 12월의 밤공기. 공항 출입문을 나서며 처음 들이쉰 그 다정한 온도와 온화한 질감. 평소엔 쉽게 지나치던 것들이 감각에 하나하나 세세히 새겨지던 순간의 설렘은, 12주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유독 잊히지 않았다.  


하루를 마치고 나면 침대 위에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는 삶 어떤데!!!?


내 또래 태국여성이 끌고 온 빨간 차가 내 앞에 경쾌하게 멈춰서며 12주의 여행이 본격적인 길로 들어섰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반갑게 내게 한국에서 활동하는 태국인 K-pop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활기차게 떠들며 밤을 달렸다. 그녀는 치앙마이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정기적으로 한국에 다녀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한국도심의 지리에도 빠삭했다. 차창 밖 치앙마이의 첫 풍경들은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마법사의 까만 상자 같았고, 첫 일주일을 묵어갈 이층집은 포근한 적막에 안겨있었다. 내 방은 욕실이 딸린 1층의 1인실이었고, 방들은 모두 문을 열면 곧바로 정원으로 연결되며, 정원엔 오픈형의 공동부엌이 마련되어있었다.


공동부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원 한 가운데 사방이 열려있는 부엌이라니! 더운 나라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일지도 모르겠지만, 몇 시간 전만 해도 뒤지게 추운 겨울 속에 있다 온 나는 갑자기 혈중낭만도가 치사량까지 치솟았다. 정원의 여름나무들은 여태까지 내가 겨울의 풍경 속에서만 봐온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장식들을 몸에 두르고 느긋이 여름밤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붙임성 좋은 호스트는 함께 내 방에 들어와 욕실과 냉장고 등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해주고, 마지막으로 열쇠로 문을 열고 잠그는 법까지 몸소 보여준 뒤 내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배운 대로 꼼꼼히 문을 잠그고, 마침내 새 공간에서 오롯이 혼자가 된 아늑함을 실컷 만끽하려던 순간, 나는 내 침대 한가운데 나보다 먼저 떡하니 자리를 잡고서 태연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저기... 누...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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