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첫날밤을!?
아직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윤기 나는 황금빛 털을 가진 고양이어린이는 목에 아주 작은 방울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서 정원과 부엌, 손님들의 방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지금이 아니면 짐을 정리하는 일은 내일 아침이 되어서나 하겠다는 위기감에 서둘러 여행가방을 열고 비어있는 욕실과 옷걸이, 탁자에 내 일상의 물건들을 내 습관에 맞추어 채워 넣었다. 그동안 고양이어린이는 침대에서 훌쩍 소파로 가볍게 뛰어가더니, 마치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물건을 검색하듯 소파 위에 올려둔 내 배낭을 맴돌며 모서리마다 신중하게 냄새를 맡았다. 마치 새로 온 손님이 이 방을 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냥국심사’라도 하는 것처럼! 다행히도 내가 심사를 통과한 모양인지, 짐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가 앉았더니 고양이어린이는 거침없이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머리를 내 옷 여기저기에 꿍-꿍- 부딪쳐댔다. 고양이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게 될 줄 알았더라면(?) 여행가방에 미리 오뎅꼬치라도 하나 챙겨 넣었을 텐데! 인생엔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때로는 그 때문에 좌절하기도, 또 때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남국의 밤에 오롯이, 오도카니
한밤중의 비상사태. 문밖으로 나를 쫓아 나온 고양이어린이가 의자 위에 폴짝 올라가 앉더니, 열쇠로 문을 잠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안, 언니 배고파서 편의점에 잠깐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올게!’ 멀어지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고양이어린이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음’이 가득했다. ‘우리집에 넘치는 숙박객들 중에 오늘밤 내 친히 너를 간택하여주었더니, 나랑 놀지 않고 어딜 가는 거야!?’ 나도 고양이어린이와 계속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밤도착엔 편의점야식’이라는 국룰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더 늦기 전에 편의점에 다녀와야 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은 고작 160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칠흑 같은 밤의 침묵에 잠겨있으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은 160미터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150미터 가량을 걸은 뒤에 모퉁이를 도니,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편의점과 여유롭게 밤길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편의점 앞엔 알알이 목걸이처럼 엮은 동그란 태국소시지를 휘장처럼 걸어두고 연신 불에 그을린 향을 풍기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중인 노점상도 있었다. 적막에 휩싸인 길을 걸어오는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놓였다. 여기가 내가 아는 태국이 맞구나, 싶어서.
편의점에서 재빨리 야식거리를 사서 돌아와 보니, 내 방 문 앞엔 빈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뿔싸, 가버렸구나, 고양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까 싶어 편의점 비닐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유혹해 봤지만, 아무 기척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서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는 내내 주변을 살폈지만, 가버린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애석한 마음을 달래며 컵라면에 물을 부어 방으로 돌아갔다. 호스트에게 배운 대로 위아래 꼼꼼하게 문을 잠그고 나니, 이번엔 정말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첫날밤도 조금 기대하기는 했지만, 고요한 남국의 밤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 문밖의 풀벌레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따끈한 컵라면에 온천계란 하나 깨트려 먹는 순간은, 뭉클한 위안을 내게 주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
12주 동안 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 떠나오기 전 스스로 물었을 때, 곧바로 명쾌하게 ‘일상의 루틴을 이어가자’는 답이 떠올랐었다. 이건 ‘늙어서 살고 싶은 곳’에서 ‘미리 살아보는’ 여행이니까, 평소처럼 일상의 루틴을 지키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그건, ‘프리랜서’인 내가 그간 내 생활을 지켜온 방법이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프리랜서의 삶은 밖에서 바라볼 땐 마냥 ‘자유’로워 보이지만, 막상 스스로 그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그것은 타인이 강제하는 규칙이 있는 삶보다도 훨씬 철저히 내 스스로 정한 규칙과 선들을 지켜내야 하는 ‘책임’과 ‘이행’의 연속이다. 정해진 출근시간이 없어도 내가 스스로 정한 시간에 칼같이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하루일과가 전부 무너지기 일쑤고, 출근할 장소가 없어도 스스로 정해둔 작업장소에서는 무조건 일을 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일의 능률이 떨어지기 일쑤다. 루틴이 무너지는 건 내 스스로 정해둔 규칙들이 무너지는 것이고, 남들의 기준에 휩쓸리는 것이며, 그러다 보면 결국 ‘왜 나는 남들과 다른 삶을 굳이 선택해 살고 있나’ 하는 회의와 자책의 질문들에 빠지게 된다.
기다란 격자무늬 창문을 벌컥 넘어온 아침의 햇살이 그 앞에 내려진 하얀 커튼에 부딪쳐 더 하얗게 빛나던 치앙마이의 첫 아침, 눈이 떠지자마자 늘 침대에 놓아두는 밴드를 집어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가서 평소와 같은 샴푸와 트리트먼트, 비누로 씻고, 화장대 앞에서 평소와 같은 순서로 평소에 바르던 것들을 얼굴에 바르는 동안, 먼 길을 떠나온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들이 어제와 같았다. 비록 한국에서 가져온 필터를 끼운 샤워기의 수압은 너무 약하고, 화장대 서랍에 비치되어있던 드라이어의 바람은 맹맹하고, 옷장엔 휴양지의 무드에 맞춰 골라온, 평소엔 입지 않는 옷들만 걸려있었지만, 매일 같이 생기는 작은 변수들에 무덤덤할 수 있어야, 큰 규칙을 지켜나가는 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에.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약한 수압도, 맹맹한 바람도, 평소 같지 않은 옷차림도, 마주한 그 순간 곧바로 익숙해졌다.
그래도 첫 일주일은 휴가처럼
치앙마이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간략히 구분하자면, 정사각형의 해자와 무너진 벽의 흔적들을 구획으로 하여 중앙에 위치한 올드타운과 그 바깥 구역들로 나뉘어있다. 12주를 세 달로 나누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머물기로 결심하고 숙소를 찾던 중, 그래도 첫 일주일은 ‘휴가처럼’ 보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휴가지’는, 치앙마이의 옛 모습을 간직한 올드타운도, 세련된 카페가 많다는 님만해민도, 현지생활을 체험하기 좋다고 잘 알려진 싼티탐이나 창푸악, 창클란도 아닌, ‘하이야Hai Ya’라고 불리는, 해자 남쪽의 조용한 주거지역에 위치한 민박집이었다. 다행히, 여행을 떠나기 전 진행 중이던 모든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고, 여행 첫 주엔,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안 다행히, 수입도 없을 예정이다. 결국 ‘프리랜서’에게 휴가가 최종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수입없음’인 걸까?
나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구글지도를 켜서 한국에서부터 미리 저장해둔 ‘첫 끼니를 먹을 식당’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숙소에서 1분 거리인 쌀국수집. ‘빨리 가서 첫 끼니를 먹고 빨리 오늘 하루를 시작해야지!’ 평소처럼 서두르며 문밖을 나서자마자, 따뜻한 남쪽햇살이 내 온몸을 다정하게 껴안아왔다.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정원을 물들인 여름의 햇살과 소리 없는 이야기를 나누어보라는 듯. 어젯밤 고양이어린이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으니, 내 온몸에 반짝이는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무가 된 것처럼, 풀잎이 된 것처럼, 나를 둘러싼 정원의 초록들을 따라서, 조용히 숨을 쉬어보았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긴 호흡을 끝까지 내뱉은 순간, 내 눈길이 가 닿은 여름나무엔, 바스락거리는 크리스마스장식들이 오직 여름의 햇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반짝임을 온몸에 가득 입고서 잔잔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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