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힘들게 나가 살려고 해? 나이 들면 한국에서 사는 게 최고야!’
해외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과 없는 친구들 모두 의견이 같았다. ‘현지남자랑 결혼이라도 하면 모를까, 나이 들면 한국에서 사는 게 최고’라고.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으며 프리랜서로 일하는 마흔을 앞둔 여성인 내게 지금의 ‘한국’은 ‘최고로 살기 좋은 곳’은 아닌데.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최고’로 변할까?
내 나라의 이방인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해외에서 학업을 하고, 노동자로도 살아보며, 타국살이의 어려움을 맞닥뜨릴 때마다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나라의 이방인’인 것보다는 차라리 낯선 나라의 이방인인 것이 낫다고. ‘아시안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지구 어디를 가든 차별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아니, 과연 이 세상에 그 모든 종류의 차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관적이지만, 다행히도, ‘지구촌시대’가 불러온 이동의 자유가 모두에게 아주 작은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이를테면, 성별임금격차는 세계1위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 것인지, 내 뿌리가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성별임금격차가 작은 나라에서 살 것인지, 선택해볼 수 있는 기회.
어릴 적 꿈은 ‘프리랜서’
나 어릴 적, 아빠는 오전 8시에 집을 나서면 밤 11시가 다 되어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 생활에 지친 엄마는 틈만 나면 어린 나를 붙들고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면 안 된다’고 불평했었다. 그 말을 주구장창 듣고 자란 나는,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보다는, 아빠처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할 시간과 일할 장소를 스스로 정하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어른이 되면 꼭 ‘프리랜서’가 되어야지’하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꿈을 이룬 삶?
매달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서 써야했던 대학생 시절, 일찍부터 재능이 필요한 분야에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변변찮지만 저절로 커리어가 쌓였다. 정규직 취업이 번번이 좌절되는 와중에도 생계를 위해 의뢰가 들어오는 일들은 계속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던 분야들에 얼결에 연차가 쌓이면서, 나는 자연스레 ‘프리랜서’가 되었다. 이 생활은 사실, ‘남들은 일하지 않는 날에도 일해야 하는 과로의 연속에,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보호막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프로N잡러’ 더하기 ‘프로과로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의 내 삶엔 내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일할 시간과 일할 장소를 내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기는 하다. 이 정도면, 어릴 적 꿈 하나는 이루어낸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뭐, 일단 그렇다고 해 보자.
‘3개월씩 사는’ 꿈
‘프리랜서’의 꿈을 이룬 후로, 또 다른 꿈이 생겼다. ‘한달살기’ 붐이 막 일어나던 즈음에 막연히 혼자 마음속으로 틔웠던 꿈이었다. 이왕 ‘프리랜서’가 된 인생, 이렇게 된 거, 1년을 계절별로 나누어서, 살고 싶은 곳에서 3개월씩 살아보자.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에 무조건 한 계절을 할당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가을’은 한국에서 살기로 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색색으로 물들이고, 황금의 들판에서는 한 해의 수확물을 거두는 계절. 봄이 아니라 가을을 택한 건, 아마도 눈부신 봄의 빛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매년 마주해온 봄의 빛 속엔 언제나, 만물이 깊은 어둠 속에 하염없이 침잠하는 지난겨울이 깃들어있었기에. 마침내 언 땅이 녹는 봄은, 그래서 하염없이 아름다웠지만, 단단하게 비추어오는 봄의 빛은, 때로는 칼날이 되어 마음을 속절없이 에곤 했다. 가슴에 파문처럼 번지는 아릿함에 ‘봄’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나니, 여름과 겨울에 머물 곳을 정하는 기준은 쉽게 정해졌다. 겨울은 ‘살을 에는’ 한국의 매서운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나라에서, 여름은 산 채로 찜통에 쪄지는 듯한 한국의 무더위를 피해서 선선한 나라에서. 그럼 봄이란 계절은, 어디에서 보내야 할까? 아무것도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건, 그 계절을 너무도 사랑하고, 기다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계절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름은 너무 더워서 싫고, 겨울은 너무 추워서 싫다는 내게 친구가 물었다. ‘보통 여름이 싫으면 겨울은 좋아하고, 겨울이 싫으면 여름은 좋아하던데. 그럼 만약에 한국의 사계절을 다 원하는 대로 바꿔준다고 하면, 넌 어떤 계절을 고를 거야?’ 무엇 하나를 고르기가 난감했다. 여름이 너무 덥다는 이유로 가을로 바꿔버린다면. 겨울이 너무 춥다는 이유로 봄으로 바꿔버린다면. 겨울을 지나지 않은 봄과, 여름을 지나지 않은 가을은, 지금만큼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기에. 깨달았다. 한국의 사계절이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내 몸에 나이테처럼 켜켜이 배어버린 관성임을.
‘태어나버린’ 나라로부터
한국은 내가 ‘스스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나라’는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도 이에 대한 선택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앞으로 살아가야하는 곳을 알지 못한 채로 이 땅에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난 뒤의 감상은 모두 다르지 않을까. ‘한국’은 너에게 어떤 나라냐고 묻는다면, ‘태어나버린 나라’다. 태어나버린 이상,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선택한 적 없는 땅에서, 선택한 적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내가 치열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이 나라는, 내가 ‘스스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나라’도, 내가 ‘살고 싶은 나라’도 아닌, 그저, ‘살아내고 있는 나라’일 뿐이다. <Feel Like Home> 혹은 <즐거운 나의 집>.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비슷한 표현이 있는 걸 보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늑하고 편안한 집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것이 태어나서부터 내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어떤 애착 같은 것이라면, 나는 이 아름답고도 잔인한 사계절을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 몸에 당연히 받아들이며 살면서도, 왜 매순간, 떠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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