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보석상자들
휴가 이틀 째. 오늘도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다. 걷기, 그리고, 먹기. 치앙마이에 오기 전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는데, ‘한 시간이 넘지 않는 거리는 무조건 걷기’다. 태국은 일 년 내내 더운 날씨 탓에 가까운 거리도 웬만하면 자동차든, 오토바이든, 자전거든, 걷지 않고 타는 문화가 보편적이고, 택시비도 저렴하지만, 치앙마이는 방콕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대기오염도가 낮고, 도로가 그다지 복잡하지 않으며, 한적한 골목길이 많고, 마침 12월은 오래 걸어도 땀이 별로 흐르지 않는 뜨겁지만 쾌적한 날씨에, 서울과 달리 평지여서 이곳저곳 모두 느긋하게 걸어 다니기 좋았다. 여름의 태양이 구석구석 환히 비추는 길 위의 소소한 일상들이, 내게는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상자다. 오늘은 또 어떤 상자를 열게 될까. 설레며 길을 나섰다. 아, 일단은, 종일 걸을 연료를 충전하기 위해, 가까운 식당부터.
하얀 쌀에 보랏빛 꽃잎을 물들여
초록이 무성한 정원에 놓인 식탁에 앉았다. 첫 끼니는 되도록 익히지 않은 야채를 먹자고 결심했기 때문에, 샐러드 메뉴가 있는 식당을 찾아왔다. 치앙마이공항과 근거리인, 치앙마이 중심지에선 제법 먼 조용한 도로변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다. 일단 따뜻한 자스민티를 한 잔 주문하고, 메뉴를 들여다본다. 샐러드로 종목을 정하고 오지 않았으면, 먹어보고 싶은 메뉴가 너무 많아서 결정장애를 겪을 뻔했다.
첫 번째로 나온 음식은 ‘태국 남부식 라이스샐러드 Southern Thai Rice Salad’. 가격은 105바트. ‘안찬’이라고 하는 ‘나비콩Butterfly-Pea’의 보라색 꽃으로 물을 내어 파랗게 지은 밥인 ‘안찬라이스’를 반숙계란과 잘게 채썬 각종 야채들-숙주, 양배추, 보라색양배추, 그린빈, 윙빈, 당근, 샬롯-과 함께 태국식 소스와 향신료에 버무려 먹는 샐러드다. 눈길을 끌었던 재료는 야채 사이에 당당히 놓여있는 포멜로과육과 쌀알을 뻥- 튀겨낸 라이스퍼프. 포멜로 과육은 쌉쌀하고 신맛이 있어서 라임즙을 뿌린 샐러드에 잘 어우러졌던 것 같고, 쌀알뻥튀기도 살짝 달고 고소한 맛과 식감이 샐러드에 제법 포인트가 되었다. 안찬라이스는 색깔은 아주 예뻤지만 특이할 만한 어떤 맛이 나지는 않았다. 다만, 파란색은 내가 배우기론 ‘식욕을 감소시키는 색깔’이라는데, 적어도 하얀 쌀밥에 곱게 물든 이 파란빛만은 예외인 것 같다. 한 번쯤 꼭 먹어보고 싶어지는 색깔 아닌가? 조금, 궁금해졌다. 처음 꽃잎을 물에 띄워 빛깔을 우려내고, 그 빛깔로 밥을 지을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하얀 쌀알이 보랏빛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리며 다시 안찬라이스를 먹어보니, 알 것 같았다. 특별한 어떤 맛이 나지 않아도, 굳이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꽃잎의 색을 물들여 밥을 짓는 이유를.
남국의 태양을 담아
반찬을 겸해서 주문한 ‘윙빈샐러드 Wingbean Salad’는 한국에서는 ‘날개콩’ 혹은 ‘드래곤콩’이라고 불리는 네 개의 뾰족한 모서리가 있는 독특하게 생긴 야채인데, 자르면 단면이 네 개의 꼭지점이 있는 별처럼 된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데, 이 요리에서는 새우와 온천계란을 곁들여서 매콤하게 요리했다. 한국인의 상식으론, ‘샐러드’보다는 반찬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데, 차가운 요리다. 태국적이면서, 동시에 ‘남도적인’ 맛이었다. 태국의 남도는 분명 한국의 남도완 다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열하는 태양이 푹 삭여내는 남도 특유의 맛이 이 요리에도 어른거리고 있었다. 215바트. 두 가지 남부식 샐러드 모두 맛있고 즐겁게 먹었지만, 치앙마이에 머무는 동안은 또 같은 메뉴를 먹을 일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태국남부를 여행하게 된다면, 그땐 꼭 다시 이 음식들을 먹어봐야지!
줏대 있는 여자
원래는 다른 목적지가 있었는데, 식당을 나오는 길에 잠깐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들어간 바로 옆 카페에 그만 발이 묶였다. 메뉴판에 있는 ‘캐슈넛머랭과 버터크림으로 만든 파블로바케이크’에 마음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곁들일 차는 ‘나비콩차’로 골랐다. 여자가 한 번 숟가락을 들었으면, 줏대 있게 밀고 나가야하는 법. 오늘의 집중탐구메뉴는 ‘나비콩’이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투명한 유리티팟에 신비한 보랏빛이 가득 담겨 나왔다. 찰랑이는 보랏빛 위엔 말린 나비콩 꽃봉오리가 연못에 무성하게 자란 연잎처럼 가득 띄워져있었고, 찻잔과 함께 꽃잎을 걸러낼 수 있는 거름망이 함께 제공되었다. 갓 우린 따뜻한 ‘나비콩차 Butterfly-Pea Tea’는 아주 부드럽고 버터리Buttery한 맛이었다. 식후에 깔끔하게 차를 마시고픈 사람들에겐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알러지 때문에 버터와 유제품을 먹지 못해 늘 그에 대한 열망이 있는 내겐 아주 흥미로운 맛이었다. 단지 말려서 우려낸 꽃봉오리에서, 한겨울의 담요처럼, 진하게 감싸 안는 도톰한 맛이 나다니! 감탄하다가, 조금 아쉬워졌다. 푸른빛을 가득 머금은 ‘안찬라이스’에도 분명 이 맛이 스며들어있었을 텐데, 샐러드에 소스를 뿌리기 전에 먼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안찬라이스를 맛볼 걸 그랬다. 치앙마이에 머무는 동안, 아마 안찬라이스를 맛볼 다음 기회가 또 오지 않을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
캐슈넛머랭으로 만든 파블로바케이크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구운 얇은 캐슈넛머랭 사이사이에 노란 버터크림을 발라서 타워처럼 쌓고 구운 캐슈넛으로 윗면을 장식한 미니케이크였다. 난 알러지 등의 이유로 우유와 버터 등의 유제품을 먹지 않는데, 지금은 모처럼의 휴가를 보내는 중이니까, 오늘 하루만은 아주 잠시 그 규칙을 깨기로 했다. 이거, ‘치팅데이’라고 불러야 하나? 캐슈넛의 고소함이 은은하게 감도는 파삭하게 구워낸 달콤한 머랭 사이사이에 샌드된 촉촉하면서도 꾸덕한 진한 버터크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따뜻한 보랏빛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파삭한 머랭 한 입. 또 따끈한 보랏빛 한 입 머금고, 꾸덕한 버터크림 곁들인 파삭한 머랭 한 입. 마녀의 망토 속을 몰래 들여다보듯, 주전자 속에 펼쳐지는 보랏빛 일렁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동안, 창밖에 석양이 내려앉았다. 오늘도 어제처럼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지만, 꺼낼 일은 없었다.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언 사진 몇 장을 찍은 것 외엔 핸드폰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하루가 다 가버리다니! 카페를 나와서 맞닥뜨린 까만 어둠에 누가 나 몰래 시곗바늘을 돌려놓은 것 아니냐고 황당해하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이 쏜살같이 흘러가버린 오늘 하루에 뿌듯해졌다.
나 오늘 진짜 ‘휴일’을 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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