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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Oct 27. 2024

고양이의 본능


고양이어린이가 다시 나타났다!


‘걸을 준비’를 마친 아침. 숙소의 작은 정원을 들여다보며 아침의 햇살로 온몸을 듬뿍 예열하고 있는데, 발목에 무언가 살랑살랑 와 닿았다. 보드라운 감촉과 따끈한 체온. 첫날 만났던 고양이어린이였다. 뒤이어 첫날 공항에서 빨간 차에 나를 씽씽 태워온 그녀도 나타났다. 첫날, 고양이는 내가 편의점에 간 뒤 여느 때처럼 그녀의 방으로 가서 함께 잤단다. 다음날, 고양이는 다른 손님을 간택해 그의 방에서 신나는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손님은 방문을 잠그고, 열쇠를 문 앞에 둔 채로 아침 일찍 떠났다. 방에서 쿨쿨 자고 있던 고양이어린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안에 갇혀버렸다. 그날 밤, 종일 외출했다가 돌아온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 놓아두는 사료가 하나도 줄지 않은 것을 보고 고양이를 찾아다녔다. 애타는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잠긴 방 안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커튼이 내려진 창문을 두들기고 있는 말썽쟁이고양이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연신 속상함을 토로하는 집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어린이는 하루를 갇혀있었어도 여전히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털을 내 몸 구석구석에 비비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열심히 애정표현을 했다. 첫날 우리의 만남은 밤이었지만, 오늘은 찬란한 아침. 밝은 빛 속에 보니 황금색 털에 잘 마른 빨래처럼 뽀송뽀송한 윤기가 흘렀다. 살결에 와 닿는 보송보송 부드러운 감촉에, 내 마음은 그 비단결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서로 다른 종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이렇게 서로를 향한 두근거리는 설렘과 환영하는 마음, 맞닿을수록 따뜻해지는 애정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아침은 이렇게 밝고 따뜻한데!


아직은 낯선 손님에게 실컷 자신의 냄새를 새겨두고, 고양이어린이는 정원구석에 놓인 화분으로 가서 자그마한 잎사귀 마다마다 앙증맞은 코를 대고 부지런히 내음을 맡으며 ‘다음 일과’를 해내기에 바빴다. 갇혀있던 어제도, 자유로웠던 그제도, 그 화분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다시 만난 세상을, 고양이는 잎사귀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성실하게 탐험한다. 고양이의 호기심은, 낯선 것들에 거침없이 온몸을 부딪쳐 자신의 체취를 남기는 그 본능은, 어쩌면 내가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살아가고 있음을 새기고자 하는, 존재의 확인은 아닐까.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 짐승과 다르다 말하지만, 고양이의 본능과 인간의 본능은,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롯이 오늘의 일상에 집중하기


갑작스레 갇힌 채 흘러가버린 어제도, 쫄쫄 굶었을 어제 하루에 속상해하는 집사도, 아랑곳 않고 오늘 내 스스로 정한 일상에만 집중하는 고양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마흔 해를 넘게 살아도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질문에 꼭 답을 적어내야 한다면, 지금의 난 일단 ‘고양이처럼’이라고 적어내련다.


걷기엔 험한 길


오늘은 걸어서 먼 길을 가기로 했다. ‘Mahodol Rd’라는 큰 도로를 따라서 핑강까지 20여분 정도 걸어야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변은 보석상자가 가득한 한적한 골목길들처럼 재미있는 길은 아니지만, 걸어서 가보고 싶었다. 인도는 곳곳에서 끊겨있었고, 때로는 차도뿐인 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며, 매연도 왕창 마셨지만,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엔 아기자기한 작은 길들을 걸었을 때와는 다른 성취감이 있었다. 


Mahodol Rd, 길을 떠나며 육교 위에서 바라본 풍경


문을 열어두는 계절


<Farmstory House> 활짝 열린 문이 반겨주어서, 기쁘게 안으로 들어섰다. 먼 길을 걸어왔더니 이것도 저것도 다 먹고 싶다. 태국식 오믈렛과 생선이 든 옐로우커리, 매콤한 태국식 바나나꽃샐러드를 주문했다. 샐러드 위에 수북하게 뿌려진 가루가 익숙하다. <Parc Thai Eatery>에서 주문했던 날개콩샐러드에 뿌려져있던 것이다. 어딘지 들깨가루가 연상되지만, 그보다 입자가 거칠다. 한 가지가 아니라 혹시 여러 가지가 섞인 가루인 걸까? 고개를 갸웃하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접시를 비웠다. 역시, ‘태국식 샐러드’는 한국인에겐 ‘반찬’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음식이 어땠냐고 물어오는 주인장에게 ‘그 가루들이 대체 뭐였냐’고 묻는 대신, 후식을 주문했다. 다음에 태국에 가면 그때는 가루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 열린 창문으로 파도처럼 넘실넘실 넘나드는 여름의 바람에 상념을 모두 맡기고 점심과 후식을 먹는 동안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다시 활짝 열린 문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지 않은 대신, 시간을 열고 나온 것만 같다.



여름은, 문을 열어두는 계절. 바람도, 사람도, 훌쩍훌쩍 넘나든다. 어디부터가 안이고, 어디부터가 밖인지, 어디부터는 바다고, 어디부터는 육지인지, 경계를 알 수 없이 해안가를 춤추는 파도처럼, 마음이 살랑살랑 일렁인다.   



개들의 본능


태양이 저물 채비를 할 때에, 낯선 동네를 산책했다. 큼직한 주택과 높은 담벼락 사이에 잘 닦인 널찍한 길을 홀로 걸었다. 노란 꽃, 빨간 꽃, 초록색 잎사귀들. 초록 안에 이토록 다양한 빛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뭇잎이 이토록 다양한 모습으로 자란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새롭기만 한, 누군가의 일상들. 컹컹컹- 누구네 집에서 개들이 짖는다. 대궐 같은 집들마다, 대문 안에 덩치 큰 개들이 집을 지키고 있다. 집을 지키는 것은 저들의 본능. 양산을 쓰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향해, 대문까지 달려 나온 개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납게 짖어댄다. 



컹컹컹- 컹컹컹- 멀어져야 할 소리가 점점 가까워온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타닥타닥 네 발이 바닥을 디디며 뛰는 소리까지.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오싹하게 솟아오르는 감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섰다. 내 뒤에 바짝 쫓아온 덩치 큰 까만 개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서 컹컹컹- 짖고 있었다. 달려들어 물기에 충분한 거리. 적대적인 개들과 마주쳤을 때, 절대 뒷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던 말이 떠올랐다. 똑바로 서서 낼 수 있는 가장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짖음이 멈췄다. 다행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재빨리 들고 있던 양산을 내려 개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개와 나의 사이가 10미터 정도 벌어진 뒤, 재빨리 몸을 돌려 걸었다. 마지막으로 본 개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도로변으로 나온 뒤에도, 헐떡헐떡 계속 가슴이 뛰었다. 이제 다시는 저 길에 산책하러 가지 않겠지. 서운하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그 마음은, 복잡한 거리를 걷는 사이에 꺼져가는 불꽃처럼 사그라졌다. 영역을 지키는 것은 개들의 본능. 서열을 따르는 것도 개들의 본능. 저들은 그저, 본능을 따르는 것뿐이니.   


어제까진 알지 못했던 두려움


돌아가는 도로변에서 다시 개와 마주쳤다. 인도가 끊긴 저 앞에, 덩치 큰 까만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주변은 온통 까만 숲. 재빨리 뒤돌아서서 온 길을 얼마간 되돌아갔다. 때마침 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 함께 건넜다. 도로 건너편은 다행히 상점이 줄이어있었다. 얼마 걷지 않아 또 덩치 큰 개가 나타났지만, 곧 근처 상점 안으로 설렁설렁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키우는 녀석인가 보다. 또 개가 나타나지는 않을지, 가슴 졸이며 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두려움이, 내 의식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개퇴치기’를 사가지고 왔어야 했나? 


아침엔 고양이의 본능과, 저녁엔 개들의 본능과 마주한 하루. ‘잘 지내고 있어?’ 메시지를 보내온 베프에게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털어놓았더니, 강아지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주택가에서 마주친 그 개, 혹시 놀자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 질문을 들으니, 양산을 내려 시야를 차단한 순간에 반갑게 흔들리고 있던 개의 꼬리를 본 것도 같았다. 정말 그랬나? 아니면, 내 안에 무럭무럭 자라나버린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한 상상일 뿐일까? 정말로 그 녀석이 그저 반가움에 컹컹 짖으며 달려왔던 거라면, 서로 다른 종이 서로를 이해하기란, 역시나 너무도 어려운 일.


야시장에 가서 바질해산물덮밥에 코코넛팬케이크를 사먹으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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