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축하하는 날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12월 24일. 성탄절 전날.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24,25일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신경이 쓰였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생명의 탄생이란, 모두 함께 축하하면 좋은 일이니까. 이날들은, 조금 특별한 식탁 앞에 앉기로 했다.
마치 집을 지은 듯, 곧게 하늘을 향해 자라난 나무 아래를 걸어 목적지인 <Meena>에 도착했다. 무얼 먹을지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라이스크런치를 입혀 튀긴 큼직한 새우튀김, ‘Riceberry Rice’, ‘Brown Rice’, ‘Butterfly pea Rice’, ‘Safflower Rice’, ‘Jasmin Rice’ 다섯 가지를 무지개떡처럼 색색의 삼각형으로 빚어낸 밥, 로컬야채와 과일로 만든 가든샐러드, 오이, 레몬, 샐러리로 만든 디톡스워터. 이름 있는 식당인 만큼 가기 전부터 이런 저런 기대에 부풀었는데, 모두 기대를 충족하는 맛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라이스크런치를 입혀 식감이 더욱 즐거웠던 새우튀김. 밀가루를 먹지 못한다는 건, 밀가루옷을 입혀 튀기는 대부분의 튀김요리 역시도 먹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변주는 늘 반갑다. 그 결과물이 맛있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참고로, <Meena>는 <Rice Based Cuisine>이라는 태그가 붙어있는, 쌀을 주재료로 요리하는 식당이다.
고양이가 마음 편한 곳
성탄절이 지나버리기 전에, 마켓을 구경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절정에 이른, 24일이 딱 적당할 것 같았다. <Meena>를 오늘의 첫 끼니를 먹을 식당으로 고른 건, 바로 옆에 <참차마켓>이라는 주말 공예품시장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붐비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마켓. 눈을 돌릴 때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장식들과 마주쳤다. 여름에 보아도 아늑한, 겨울의 품에서 태어난 빨간색과 초록색들. 그리고 어김없이 마주친, 한낮의 고양이. 고양이어린이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에, 마음이 편해졌다. 때마다 밥을 주는 집사와 안락한 잠자리가 있는 고양이들은, 낮에는 마음껏 동네 여기저기를 탐험하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곳이면 어디든 낮잠을 청한다. 고양이가 마음 편한 곳은, 사람도 마음이 편하다.
소비 후에 남은 것
처음으로 쇼핑을 했다. 치앙마이에 오는 관광객들은 모두 한 개씩, 아니 여러 개씩 산다는 라탄백. 매일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형편이기에, ‘좀 더 가벼운 가방’은 늘 내 버킷리스트 상위권을 점거하고 있다. 노트북을 넣으면 딱 좋은 크기의 라탄백을 발견하고 들어 보니, 너무너무 가벼웠다. 오늘도 나는, 꺼내지 않을 것이 분명한 노트북을 에코백에 넣어 나온 참이었고, 치앙마이에 와서 매일 같이 노트북을 싣고 다니는 중노동을 한 에코백은 벌써 손잡이의 바느질이 뜯어지고 있었다. 가볍지만 튼튼해 보이는 짜임새의 라탄백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내 지갑을 열었다. 다음으로 마주친 것은 직접 뜨개질한 머리띠. 머리띠를 하고 한두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아파오는 건, 내 평생의 작은 문젯거리다. 끈으로 묶는 머리띠를 해보니, 처치 곤란인 앞머리도 훨씬 자연스럽게 고정되고, 두통이 생길 일도 없을 것 같다. 낙찰. 또 지갑이 열린다. 어느새 마켓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나 보다. 좌판에 진열해두었던 물건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모습들을 지나치며, 내 쇼핑도 이제 끝났나 보다 생각한 순간, 맨 끝 노점에서 걸음이 멈췄다. 덥석 집어든 건, 직접 수를 놓은 곱창머리끈. 하얀 면에 수놓아진 꽃들이, 치앙마이의 풍경 같았다. 한국에서라면 아마, 눈길조차도 닿지 않았을 물건. 지갑이 또 열렸다.
길을 끝까지 걷는 동안 상인들은 모두 떠나고, 남겨진 빈 의자를 찾아가 앉았다. 오늘 산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본다. 노트북을 넣고 다닐 가볍고 튼튼한 가방, 머리가 아프지 않은 머리띠, 내 삶의 소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줄 이유 있는 소비와 그냥, 머리를 묶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치앙마이를 닮은 머리끈. 스스로 오늘의 소비를 평가해본다. 다 잘 샀다. 쓸모도 있고, 음, 위안도 되고. 오늘이 24일인 덕분에, 스스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선물인 셈이네. 돈은 내 손을 떠났지만, 등가의 물건 말고도, 무언가 더 남았다.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어떤 감정들이.
다른 사람들은 가지 않는 길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택시를 타고 마켓을 떠날 때, 홀로 빈 마켓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했다. 아주 뒤늦게, 홀로 걸어서 길을 떠났다. 인도는 따로 마련되어있지 않고, 관광객도 현지인도 모두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그 길에 홀로 걷고 있으니, 매연을 마시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좀 더 걸어가니, 사람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아주 드문드문, 차는 내 곁을 쌩- 지나쳐간다. 나무그늘조차 드문 뙤약볕.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도 나뿐인가 보다.
진분홍 꽃내음 사라지기 전에
지칠 즈음 너른 정원이 있는 Tea House에 도착했다. 이 정도 규모는 ‘정원’이 아닐 ‘평원’이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온실처럼 생긴 건물 안은 마치 어여쁜 찻잔과 티팟을 애지중지 모으는 어느 교양 넘치는 부인의 응접실에 온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메뉴판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Rose Water>를 주문하고, 까마득할 정도로 드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 전부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실내가 어둑어둑한 덕분에, 창문 밖 여름이 더 선명하다.
곧 내 앞에 놓인 장밋빛 장미수. 고운 분홍빛과 빨간 장미 한 송이에 기분이 나풀나풀 춤을 춘다. 이 응접실의 주인인 교양 넘치는 주인처럼 천천히 우아하게 장미의 빛깔과 내음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지만, 먼 길을 걸어온 탓에 한 모금 일단 쭉 들이켜고 말았다. 속 시원해지는 해갈 뒤에 은은하게 감싸 안는 장미향. 제법 진해서 오랫동안 여운이 느껴졌다. 시럽을 넣은 듯 단맛이 있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진분홍내음이 얼음에 녹아 맹맹해지기 전에 서두르고 싶었던 걸까. 물 위에 띄운 버들잎 하나처럼, 꽃 한 송이 곱게 띄워둔 장미수를,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나는 빨랫줄에 널린 빨래
계획변경. 산책을 하기로 했다. 온실에서 나와, 아까는 긴 길을 걸어오느라 지쳐 건성으로 스쳐지나갔던 크리스마스장식들에 하나하나 눈길을 주었다. 살랑살랑 곁에 다가와 귓속말을 간질이는 바람. 바람이 가는 곳으로, 뒤따라 걸어본다. 끝없이 펼쳐진 이 넓은 평원에, 나뿐이다. 드넓은 초록의 바다에 몸을 던지듯, 두 팔을 한껏 펼쳤다. 쫙쫙 펴서 빨랫줄에 널어둔 빨래처럼 쭉쭉 펴진 몸에 구석구석 기분 좋게 내리쬐는, 여름의 온도. 구석진 벤치에 앉아 한참동안 혼자 광합성을 했다. 그저 널브러져서 햇볕을 잔뜩 쬔 것뿐인데, 운동이라도 실컷 한 것처럼 온몸이 나른해진다. 이대로 숙소에 가서 이른 잠에 들면 좋겠다. 돌아갈 결심을 하고 택시 앱을 켰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볼트도, 그랩도. 가까운 곳에, 택시가 하나도 없다. 이런, 혼자서 너무 엉뚱한 곳으로 걸어와 버렸나 보다.
혼자서 발 동동 구르면 무엇 하리오. 택시가 마음먹으면 불러낼 수 있는 근두운도 아닌 것을. 택시가 잡힐 때까지, 느긋하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실은, 바로 옆에 지도에서 미리 찾아둔 딤섬가게가 있었다. 오늘 하루를 전부 계획한 대로 마치라고, 택시가 잡히질 않나 보다.
소통의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지나쳤다. 바스락대는 소리를 쫓아 건물 뒤편으로 갔더니, 치즈고양이 한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폴짝 풀숲에서 튀어나온다.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온 고양이어린이가 당당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넌 누구야? 새로 온 캣타워야?’ 짧은 탐색을 끝나자마자 치즈고양이어린이는 내 발등 위를 타넘고, 다리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부지런히 반가움을 표현했다. 이따금 애옹-하고 날 향해 무언가 말하기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도, 고양이는 사람과 늘 열심히 소통을 한다. 제 몸집보다 족히 스무 배는 더 큰, 생김새도 소통방식도 너무나 다른 종족들에게, 무턱대고 다가와 온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이 작은 친구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두집 고양이는 당당해!
메뉴가 적힌 종이에 직접 체크를 해서 주문하도록 되어있는 딤섬집이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딤섬에 와르르 체크를 해서 종업원에게 넘겨주니, 얼마 되지 않아 하나씩 갓 쪄낸 딤섬이 나온다. 첫 번째 메뉴는 딤섬집에 가면 항상 주문하는 새우로 만든 하가우. 뒤이어 새우가 든 딤섬들이 줄줄이 나왔다. 모두 기대했던 맛. 다음으로 나온 음식들은 새우튀김을 넣은 창펀-얇은 쌀반죽을 넓게 펴서 속을 넣고 돌돌 말아 익힌 것-과 야채와 함께 밀전병에 싸먹는 북경오리. 치앙마이에 와서 태국음식이 아닌 음식은 처음이다. 창펀과 북경오리는 한국에서도 치앙마이에서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아닌지라, 메뉴판에서 발견했을 때 ‘택시를 타고 먼 길을 온 보람이 있네’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 북경오리 한 조각을 남겨놓았을 때, 주방에서 무언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아까 정원에서 치즈고양이어린이에게 냅다 달려들어 레슬링을 하던 고등어고양이어린이다. 목에 ‘캣스카우트’ 같은 스카프를 하고서 당당히 나를 쳐다보면서 걸어온 고양이는, 내 의자 팔걸이에 훌쩍 앞발을 걸치고 두발로 서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순식간에 식탁 위로 올라가 이 접시, 저 접시,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안 돼,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 안 돼, 너무 짜!’ 이제 그만 내려가라고 손짓한 순간, 고등어고양이어린이는 접시에 남아있던 오리고기 한 조각을 냉큼 물고는 잽싸게 건너편 식탁 아래로 도망가 순식간에 꿀꺽 먹어치워 버렸다.
‘얘, 너 냥아치니?’
‘여긴 내가 사는 집이고, 이 음식들은 전부 나한테 밥을 주는 집사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맛을 보는 거죠! 근데, ‘냥아치’가 뭐예요?’
한발 늦게 주방에서 나온 종업원이 두리번거리며 고양이를 찾는다. 식탁 밑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발견된 고양이는 얌전히 종업원의 품에 안겨 주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홀에 나온 –아마도-사장님이 식사를 끝낸 내 접시들을 치워가며 맛이 어땠는지 물었다.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녀와 난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등어고양이가 목에 하고 있는 귀여운 스카프는, 사장님이 주말마다 열리는 나이트마켓에서 구입한 것이란다. 고등어고양이어린이가 오늘 손님의 식탁에서 오리고기 한 조각을 당당하게 훔쳐 먹은 사실을, 나는 그녀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