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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Oct 27. 2024

접시 위에 꽃잎 한 움큼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밖으로 나섰더니, 이불을 널어둔 의자 그늘아래 치즈고양이어린이가 한갓지게 아침을 즐기고 있다. 한 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인생의 낭만을 아는 고양이. 인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내 발밑으로 달려와 부지런히 ‘오늘의 소통’을 시작한다. 다리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는 기본, 오늘부터는 밤만주 같은 앞발로 내 발목을 꼭 붙들고 발밑에 벌러덩 드러눕기가 추가됐다. 하루씩 차근차근, 친해지는 중. 고양이집사들은 이런 고양이를 두고 아침마다 어떻게 출근하는 걸까?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고양이어린이와 나 사이가 가까워졌음이, 발목에 와 닿는 따끈따끈한 체온과 살랑살랑 살갗을 스치는 보드라운 황금빛 털로부터 전해진다. 정말 꿈만 같은 순간인데, 덜컥 걱정이 덮친다. 우리는 내일이면 헤어질 텐데. 첫날 고양이어린이와 함께 밤을 보냈더라면, 이곳에 머무는 내내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떠나는 날엔 아마, 대성통곡을 했겠지!


이제 일어난 거야? 난 새벽부터 일어났는데!


자전거가 생겼다


노트북이 든 에코백을 자전거 바구니에 넣고, 에코백 손잡이를 자전거 손잡이에 단단히 묶었다. 어젯밤부터, 자전거가 생겼다. 그저께, 숙소로 돌아와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와 딸에게 –이 숙소는 내 또래의 태국여성과 그 어머니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먼 동네에 갔다가 큰 개를 만나서 가슴이 철렁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해가 진 뒤에 외진 곳을 걸어 다니면 위험하다고 두 여성이 제 일처럼 걱정하며 내게 자전거열쇠를 건네주었다. 내가 당연히 택시를 타고 다닐 줄 알았던 모녀는 여기저기를 걸어서 마구 쏘다니고 있다는 내게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열쇠를 건네받고 시험 삼아 근처에서 열리는 나이트마켓에 다녀왔는데, 오토바이들과 섞여 잘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다행히 곧바로 사라졌다. 레저가 아닌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이 북유럽이어서 그런지, 자전거를 탈 때는 인도보다 도로를 달리는 것이 워낙 익숙하기도 하고 – 북유럽국가들은 대부분 자동차도로에 자전거도로가 함께 마련되어있다 -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자전거를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배려해주어서 밤길에도 매우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치앙마이 운전자들 – 아마 개중 상당수는 여행자들일 – 매너 참 좋다!


아는 길을 달리는 것


12월 25일, 성탄절. 종교가 없는 내겐 아무 날도 아니지만,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보내기엔 뭐한 날이다. 자전거도 생겼으니, 핑강가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걷기엔 조금 삭막하고 위험한 도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엔 딱 좋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큼직큼직한 풍경들과, 경쾌하게 스치는 바람, 한층 낮아진, 여름의 온도. 이미 한 번 걸어본지라, 이미 알고 있는 길. 지도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오로지 저 앞을 살피며 페달을 밟는 것에만 집중했다.   


목적지는 <Rose Ville Farm-장미마을농장>


안성재 셰프는 의미 없는 꽃은 접시에 놓지 말라 했지만 


접시에 장미 꽃잎이 수북이 담겨 나왔다. 곧바로 생각했다. ‘이거 완전 인스타용인데?’ 그건, 맛은 그리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려한 사진을 남긴 것으로, 그 접시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한 듯 보였다. 한 입 먹어보았다. 장미 꽃잎이 생각보다 맛이 괜찮구나!? 통통한 새우, 얇게 간 파마산치즈, 아삭아삭한 푸른 잎사귀들과도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먹다보니, 샐러드야채에서 아주 작은 애벌레가 나왔다. 이야기는 해줘야겠다 싶어 종업원에게 귀띔했더니, 곧바로 사장님이 와서 야채를 새것으로 바꿔주며 ‘전부 인근 농장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야채이기 때문에 가끔 생기는 일이니 양해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예상했던 바지만, 내가 먹은 음식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상세하게 말씀해주셔서, 즐거웠다. 이렇게 자신들이 만든 음식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고, 그걸 손님에게도 기꺼이 설명할 수 있는 식당들은 꼭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먹기 전부터 먹은 것처럼 배부른, 꽃의 향연


시들지 않는 꽃다발


분홍빛 장미수, 분홍색 장미모찌, 싱싱한 장미 꽃잎을 수북이 담은 샐러드를 놓은 한여름의 성탄절 식탁. 푸른 야채와 붉은 꽃잎을 뒤섞어, 한 움큼 입에 떠 넣어 본다. 의미 없는 꽃은 접시에 놓지 말라 했지만, 장미꽃 한 다발만큼, 접시에 꽃잎을 가득 담으니,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한여름 속에 갑자기 뚝 떨어진 어느 성탄절 낮, 오롯이 홀로 앉은 여름의 식탁으로부터 선물 받은 장미꽃 한 다발. 그 꽃다발은, 영원히 시들지 않고서, 내 기억 속에 처음의 붉은 빛 그대로 남게 되었다. 



성탄절은 고양이와!


자전거를 씽씽 달려 숙소로 돌아왔더니, 치즈고양이어린이가 쪼르르 쫓아와 내 앞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날 붙잡고 이쪽저쪽으로 열심히 뒹굴다가, 땡그란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고양이어린이. 그 눈동자가 마치 ‘이제 집에 있을 거지?’라고 묻는 것처럼 느껴진 건, 고양이와 함께 밤을 보내고픈, 내 바람이었나.


여행을 떠나오기 전 생각했던 ‘성탄절을 아늑하게 보내는 계획들’ 중엔 ‘먹을 것을 잔뜩 사다두고 숙소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보내기’도 있었다. 거기에 ‘고양이와 함께’가 추가될 수도 있다곤, 떠나오기 전엔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당장 이 녀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꽁꽁 잠가버려? 나와 성탄절 밤을 보낼 수밖에 없도록!? 문제는, 고양이는 있는데, 먹을 게 없다. 이건 정말 큰 문제. 편의점에서 사다둔 똠얌맛 감자칩 한 봉지와 초콜릿맛 귀리음료 한 팩이 있긴 하지만, 달랑 이걸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성탄절의 긴긴밤을 보내기엔 턱도 없잖아. 지금 빨리 나가서 뭐라도 더 사다두자. 결심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고양이어린이가 여전히 내 발밑에 뒹굴뒹굴하고 있다. 아... 나가지 말까? 



아무도 찾지 않는 광장의 밤


‘금방 들어올게.’ 약속을 하며 길을 나섰다. 날 따라 얼마간 걷다가 훌쩍 내 방 앞 의자 위로 뛰어오른 고양이어린이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루밍삼매경에 빠졌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작은 시장이 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음식노점 대여섯 개가 모여 있는 곳인데, 인근 주민들이 오며가며 일상적으로 식사나 간식을 사먹는 곳 같아서 이 숙소를 떠나기 전에 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자전거에 오르니 성탄절 밤을 맞이한 치앙마이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진다. 내 자전거는 이미 시장을 지나 성큼성큼 도로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곧 올드타운의 남쪽 출입구에 다다랐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성탄절의 올드타운을 한 번 거닐어볼까 했지만, 너무 북적인다. 방향을 틀어 해자를 따라 달렸다. 시끌벅적한 올드타운의 밤, 내가 찾던 밤은 아니다. 해자가 끝나고, 그대로 계속 쭉 달려 나갔다. 조촐한 크리스마스가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광장에 자전거를 세웠다.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꽤 귀여운


오늘이 지나도


아무도 보러오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러 갔다. 북적이는 성탄의 밤 한가운데에서 한참을 벗어난, 밤의 구석자리. 가까이 가보니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다 마신 맥주병들이 가지런히 세워져있다. 작은 전구를 몸에 두른 초록색 병 하나하나가, 모두 크리스마스트리다. 대체 누가 여기에 이런 귀여운 장식을 해둔 걸까? 광장 앞에 불을 밝히고 있는 음식점 두 곳에 절로 시선이 간다.  



초록색 맥주병이 푸르른 나무처럼 당당히 빛나는 날. 모두가 기다렸던 날이 저물어간다. 오늘이 지나도, 이 장식들은 얼마간 더 이 자리에서 빛날 테지. 새로이 축하할 날이 다가오면, 이 광장은 그 어떤 것들로 다시 채워질까.



저녁식사를 포장해갈까 싶어 광장에 불을 밝힌 음식점 두 곳 중 인도커리를 파는 식당으로 향했다. 성탄절엔 생강쿠키라든가, 글록-향신료를 넣고 끓인 크리스마스와인-이라든가, 무언가 향신료가 든 음식을 먹어야할 것 같아서다. 어젯저녁엔 홍콩음식을 먹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성탄절과 전날 이틀의 식탁은 세계의 음식들을 고루 차려 먹은 셈 치자. 광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야외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서 바삭바삭하게 튀긴 생선요리를 보자마자, 계획은 변경되어버렸다. 튀김은 그 자리에서 바로 먹지 않으면 눅눅해지잖아! 당연히 먹고 가야지! 담백하고 깔끔한 라씨, 새우가 든 부드러운 커리, 도톰하고 바삭한 옷을 입힌 생선튀김. 음식은 따뜻했고, 향신료가 풍기는 성탄절 밤의 향기는 진했고, 음식을 내어준 사장님과 직원들 모두 친절해서, 마음도 따끈따끈해졌다.


수수하지만, 따뜻한


태초에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밤길을 달려 다시 숙소 인근 시장으로 향했다. 이런, 계획에 없었던 저녁식사를 즐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성탄절이라 모두 일찍 집으로 돌아간 걸까. 노점들이 다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진 자리에 잿빛만이 홀로 덩그러니 웅크린 노점풍경에 아쉬워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새까맣고 덩치 큰 개 세 마리가 뛰쳐나와 내 뒤를 쫓으며 컹컹 짖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빛나는 두 눈과 거침없이 드러낸 커다란 이빨에서 선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먹잇감을 몰듯, 개들은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자전거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개들 사이에 갇혀버렸을 것이다. 침착하게 페달을 밟아 개들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자꾸만 머릿속에 자전거에서 고꾸라지는 상상이 일어 모골이 송연했다. 턱까지 차오른 숨으로 한동안 페달만 밟았다. 드디어 가로등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지나다니는 거리에 다다라서야 속도를 늦추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방금 전엔,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숙소에 도착해 자전거를 세우면서 제일 먼저 고양이가 앉아 그루밍을 하던 의자부터 살폈다. 텅 비어있는 의자.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 건 나면서, 괜히 사라져버린 고양이가 야속하다. 


인간이란, 태초엔 참 보잘 것 없는 존재였겠구나. 사나운 이빨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이, 그저 연약한 거죽 하나 입고 태어났으니.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도록 하였을까. 태초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너무도 연약했기에, 온힘을 다해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국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는 두 번째 권에서 <올드타운에서 보낸 일주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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