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시계를 따라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장 열심히 한 일은, 구글지도에 부지런히 별표를 달아두는 것이었다. 지도에 빼곡한 별들의 90%가 먹을 곳들이다. 새아침이 밝았으니, 부지런히 먹으러 가자! 당연하게 문밖에 널어둔 빨래와, 바람이 솔솔 드나들도록 나무로 살을 만들어 끼운 여름대문에 걸려있는 크리스마스리스와, 이층집의 지붕을 훌쩍 넘어선 키로 늠름하게 자라난 나무에 알알이 화사하게 영근 여름꽃들에 시선을 빼앗겨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바라보았지만, 느리게 걸어도 목적지는 금세 눈앞에 나타났다.
들어가는 문이 없다. 벽도 없다. 거리를 향해 시원하게 뚫려있는 쌀국수집. 한적한 아침, 손님은 나 하나뿐이다. 조용한 동네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어묵쌀국수를 한 접시 주문했다. 60바트. 오늘 환율로 2천원이 조금 넘는 가격. 맑은 국물이 제법 얼큰하다. 첫 끼니로 먹기에 부담 없는 깔끔한 맛과 적당한 양, 딱 기분 좋은 포만감. 다른 메뉴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문 전부터 눈여겨봤던 메뉴판을 집었다.
이 집엔 두 개의 메뉴판이 있다. 하나는 분홍빛을 띠는 국물 때문에 ‘핑크누들’이라고도 불리는 ‘옌타포’를 포함한 쌀국수메뉴판이고, 다른 하나는, 얇은 당면을 새우나 오징어 등 원하는 재료와 함께 두꺼운 팬에 간장소스로 짭짤하게 볶아낸, 당면국수메뉴판이다! 익으면 투명해지기 때문인지 ‘Glass Noodle’ 혹은 ‘셀로판누들’이라고 불리는 당면을 태국사람들은 두꺼운 것, 얇은 것 등 여러 가지 두께로 먹는데, 볶음요리엔, 아무래도 단시간에 양념이 골고루 밸 수 있는 얇은 당면이 제격인 것 같다.
유학시절 스웨덴 슈퍼마켓에서는 한국소면처럼 얇은 ‘Glass Noodle’을 비롯해서 태국 식재료들을 흔히 구할 수 있었는데, 태국인친구가 전수해주었던 ‘볶은 당면국수’ 레시피를 난 스웨덴의 긴 겨울동안 자주 요리해 먹었었다. 이 요리는 잡채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인이라면 모두 친숙하게 느낄 맛인데다, 짭짤하고 기름지기 때문에 맥주와의 궁합이 아주 좋다. 그래서 처음 자리에 앉아 두 개의 메뉴판을 보았을 때부터 난 ‘저녁엔 갓 볶아낸 따끈따끈한 당면국수에 맥주 한 잔 곁들이면 끝내주겠군!’이라는 저녁식사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당이 오후 네 시에 문을 닫는 것이 걸림돌이다. 오전 아홉 시 반부터 오후 네 시까지라는 낯선 영업시간. 한국에서 구글지도로 숙소주변을 미리 살펴보니, 치앙마이의 식당들은 판매하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서 오전영업만 하는 식당과 오후영업만 하는 식당들이 나뉘어져있는 것 같았다. 개중 오전에만 문을 여는 식당들은 대부분 아침을 먹을 여덟 시 즈음 이르게 장사를 시작해 점심식사가 끝나는 오후 두 시나 세 시면 문을 닫던데, 한적한 주거지 한복판에 느긋하게 자리 잡은 이 식당의 시계는, 그보다 한 시간 즈음 늦게 돌아간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정해져있고, 시곗바늘은 모두 같은 시간을 가리키며 돌아가지만, 치앙마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계를 따라 하루를 보낸다.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빈둥빈둥 상념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비어있던 옆 테이블에 단란한 세 가족이 와 앉았다. 이만 그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구 붐비는 러시아워는 없지만, 한적하게 이어지는 작은 동네국수집의 시간들. 내일도, 모레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앉아, 무념의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구글지도에 별표를 쳐둔 식당들이 쌓여있지만, 그래도 여긴 숙소 바로 앞이니까, 이곳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이 집에 다시 들를 수 있지 않을까?
휴가를 보내는 방법
배를 적당히 채웠으니, 이제 느긋하게 걷자. 남국의 태양이 화려한 색깔로 물들인 꽃들도 보고, 서로 다른 초록빛깔을 뽐내는 나뭇잎들도 보고,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파랗게 물드는 맑고 따뜻한 여름하늘도 보고.
‘그래도 첫 일주일은 휴가처럼 보내자’고 결심했을 때, 반사적으로 의문이 뒤따랐었다. ‘휴가처럼’이 대체 어떤 거지? 모처럼 값나가는 호텔을 잡아서 욕조에서 거품목욕이라도 할까? 아니면 근교에 투어를 다녀올까? 머릿속에 휴가를 보내는 수가지 방법들이 떠올랐지만, 내 선택을 받은 건, ‘느리게 걷기’다. 길을 나서는 내 에코백엔 평소와 다름없이 노트북이 들어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의뢰받은 프로젝트들은 전부 마무리했지만, 갑자기 연락이 와서 수정작업을 해야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의뢰가 들어와서 잠깐 의논이라도 하려면 노트북이 편하니까. 정말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들이 오늘도 내 어깨에 묵직한 짐을 지웠다. 아니, ‘걱정’ 말고, ‘준비’라고 해둘까.
또래친구들은 모두 마흔을 넘기고도 배우자도, 자식도, 출근할 직장도 없는 나를 ‘자유인’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내 오늘 하루엔 짐이 점점 늘어만 간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빠짐없이 챙기느라. 지도에 찍은 다음 목적지까지, 예상소요시간은 25분. 길 위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걷다보면 한 시간쯤 걸리려나? 목적지를 설정해둔 건, 이 낯선 도시의 수많은 길들 중에서 내가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밖에 내어둔 빨래건조대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햇살에 보송보송 마르고 있는 이불, 그 위에 낙서처럼 새까맣게 칠해진 전선들, 태국의 미감을 품은 대문의 쇠창살, 집 앞에 덩그러니 의자를 가져다 두고 한낮의 햇살 속에 앉아있는 사람, 코에 까만 점이 있는, 담장 위를 걷는 고양이,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닭장 속 닭들. 뜨거운 태양 아래, 더 뜨거운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오늘의 양식들. 내 마음에 들어온, 오늘의 거리풍경들. 멈춰 서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여름의 햇살이 넘치는 온도로 나를 이마부터 발끝까지 골고루 어루만진다.
절반 정도 걸었을 때, 쇼핑몰이 나타났다. 살 것은 없지만 내 앞을 걷던 누군가의 걸음에 이끌려 덩달아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크리스마스트리, 상점마다 초록색과 빨간색 상품들이 가득하다. 푸드코트엔 학생과 직장인들이 늦은 점심식사 중이다. 학생식당 같은 분위기. 호기심이 생겨서 매콤한 오징어 덮밥을 하나 주문했다. 계란후라이도 하나 추가. ‘치앙마이에 혹시 먹으러 왔나요?’ - ‘네!’ - 이 쇼핑몰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먹어볼까?’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식권을 샀다. - 덧붙이자면, 점심에 들렀던 숙소 앞 1분 거리 국수집에는 결국 다시 가지 못했다. - 주문을 받자마자 커다란 웍에 오징어를 우르르 던져 넣은 직원이 돼지고기가 든 그릇을 내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 ‘Meat?’ 소, 닭,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기 때문에 서둘러 거절의사를 표하고 다시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오징어덮밥’ 메뉴 어디에도 돼지고기가 들어간다는 설명은 없는데. 손님들을 조금이라도 더 배부르게 먹이고 싶은 사장님의 인심일까? 비록 나는 거절했지만, 이 생각지 못한 인심에 하루가 든든해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쇼핑몰을 나온 뒤엔 또다시 걷기. 마스크를 쓰고 걸어도 크게 갑갑하지 않다. 땀이 별로 흐르지 않는 산뜻한 더위. 알록달록 생활용품들을 쌓아둔 잡화점엔 크리스마스장식들이 ‘내 계절은 여름’이라는 듯 여름의 햇살과 바람에 바스락바스락 태연하게 반짝인다.
목적지인 비건카페에서는 그린스무디와 버섯이 들어가는 글루텐프리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샌드위치는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행 첫날부터 찾아 먹을 정도로 특별한 음식은 아니겠지만, 밀가루알러지가 있는 내게 ‘글루텐프리’ 빵으로 만든 비건샌드위치는, 여행을 오기 전부터 기대하던 음식 중의 하나였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Vegan’이 제법 대중화가 되었지만, ‘Vegan’과 ‘Glutenfree’를 동시에 충족하는 음식은, 특히 밀가루가 주재료인 베이커리 쪽에서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식사를 마치고, 호주에서 왔다는 주인장과 오늘 음식 맛이 어땠는지에 대해 스몰톡을 나누고, 다시 걷기. 낮의 파르람은 서서히 땅 밑으로 가라앉고, 하늘엔 조금씩 밤의 잿빛이 번진다. 복잡한 도로 한 편에 자리를 잡은 노점상은 알알이 속을 채운 동그란 태국소시지를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공원엔 황금색 나뭇잎을 주렁주렁 걸어 장식한 여름의 크리스마스트리. 상점 앞을 지키는 고양이들이 그루밍을 하다 말고 불쑥 들이 밀어지는 네모난 핸드폰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본다. 숙소 앞에 다다르니, 까맣게 해가 졌다.
에코백에 넣어간 노트북은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걸으면서, 평범한 치앙마이의 풍경들을 가득 마음에 담은 하루.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제보다 더 친근해진, 기다란 창문이 있는 방.
그런데, 첫날 나를 실컷 환대해주었던 고양이어린이가 이틀째 눈에 전혀 띄지 않는다. 설마, 내가 방에서 내쫓았다고 생각해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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