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두 번째 주의 기록
여름은, 불 피우는 계절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소시지 굽는 연기가 자욱하다. 여름은 태양의 계절. 제 계절의 위용이 넘치는 뜨거운 햇살 아래, 치앙마이 사람들은 마치 맞불을 놓듯 뜨거운 숯불을 놓고 뜨끈하게 달구어진 석쇠 위에 부지런히 먹을거리들을 구워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캐한 연기 속에 섞인 불향이 스며든 감칠맛 나는 냄새에 절로 석쇠 위로 시선이 간다. 돼지내장에 고기를 채워 직접 만든 태국식 소시지, 두툼한 고깃덩어리, 바나나잎에 싼 –아마도 육류로 추정되는-무언가. 아래에서는 숯불이, 위에서는 여름의 태양이 그을려, 까맣게 석쇠자국을 입은 채 익어가는 음식들. 숯불이 화끈하게 불향을 입혀준 그 맛, 맛보지 않아도 아는 익숙한 그 맛에 ‘사람 사는 거, 다른 듯해도 결국 다 똑같지’ 생각을 한다.
예전이라면 냉큼 뭐라도 하나 사서 맛보았을 텐데, 이젠 돼지고기는 먹지 않으니 불향 몇 번 들이쉰 것으로 만족하고 타박타박 다시 걸음을 옮긴다. 자욱한 연기는 한참 지나서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태양빛 머금은 꽃들의 빛깔과 싱그러운 바람이 벼리어 낸 푸르른 잎사귀, 그리고 첨벙- 두 발을 담그고픈 파아란 하늘. 하루, 또 하루, 걸어갈수록, 내 마음의 빛깔도 치앙마이의 풍경들을 따라 한 꺼풀, 또 한 꺼풀, 맑게 걷힌다.
안녕하세요, 접수는 고양이한테 하세요!
며칠 전부터 거리에서 내 시선을 잡아 끈 것들이 있는데, 천막 아래 널찍한 탁자를 펼쳐두고 재봉틀 하나 덩그러니 올려둔 채 옷이나 가방, 신발 따위를 수선해주는 노점들이다. 잠시 멈춰 서서 수선하는 풍경을 지켜보기도 했는데, 거리의 온갖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들이, 가히 장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했다. 마침 가져온 여름옷가지들 중에 길이가 애매한 바지가 하나 있어 ‘길 위의 장인들’에게 수선을 맡겨볼까 하던 참, 오늘 발견한 새로운 재봉노점 앞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그런데, 재봉틀 앞에서 바쁘게 수선일을 하고 있는 주인장 발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있다. 초콜릿 빛이 살짜쿵 섞인 오묘한 잿빛 털을 가진 고양이, 꼬리를 뒤에 길에 늘어뜨리고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꼭 인형 같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털에서, 집사가 고양이에게 쏟고 있는 사랑이 담뿍 느껴진다. 주어진 일을 해내느라 바쁜 집사 곁을 떠나지 않고, 노점 바로 앞에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를 보니, 꼭 고양이가 카운터를 보는 노점에 온 것 같다.
‘수선하실 거예요? 저한테 접수하세요! 집사는 재봉하느라 바빠요.’
어느새 뚝딱 수선을 마친 주인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훌쩍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는 고양이. 일하는 동안 내 대신 카운터를 보느라 수고했다고, 집사가 보송보송한 고양이엉덩이를 툭툭툭- 두들겨준다. 사랑이 넘치는, 치앙마이의 아침풍경.
더운 나라의 더운 야채
짧은 산책을 마치고 ‘새둥지’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을 먹을 곳은 <Bird’s Nest>라는 식당. 늘 지키는 아침식사 루틴을 따라서 샐러드와 요거트보울을 주문하려다가, 그만 다른 메뉴에 꽂혀버렸다. ‘직접 재배한 채소들로 만든 구운 샐러드’.
내가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국에서는 ‘아웃백’이나 ‘베니건스’, ‘T.G.I.’ 같은 미국식 패밀리레스토랑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면 먹고 싶은 메뉴는 많고도 많았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문득 돌아보니, 내가 그 시절 사장 즐겨먹었던 메뉴는 메인요리를 주문하면 함께 주문할 수 있는 ‘더운 야채’였다.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당근, 애호박 등을 한 입 크기로 잘라 오븐에 익힌 간단한 음식이지만, 치즈와 크림 따위를 듬뿍듬뿍 넣은 화려한 메인요리들을 질리지 않고 먹으려면, 수수한 ‘더운 야채’는 식탁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흥했던 패밀리레스토랑들이 쇠락의 길을 걷고, 요즈음엔 한국에 몇 남지 않은 패밀리레스토랑들의 메뉴판에서 ‘더운 야채’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던데. 그 시절엔 단지 ‘사이드side’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음식이 인생을 더 살아보니 내 ‘메인디쉬maindish’였다는 사실을, 훌쩍 떠나온 아직은 낯선 나라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갓 따온 정원의 맛!
기대감을 가득 안고 자리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내 앞에 놓인 ‘구운 채소 모둠’ 한 접시엔, 기대한 바로 그 모양과 맛에 치앙마이만의 개성이 한 술 더 더해져있었다. 당근, 애호박, 단호박 같은 익숙한 뿌리채소들은 스무 살 무렵 맛있게 먹었던 ‘더운 야채’들의 기억을 불러내며 기대했던 행복감을, 베이비콘, 그린빈, 기다란 버섯 등의 채소들은 아직은 낯선 치앙마이의 토양이 전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모든 야채들에 정원에서 갓 따온 채소들만이 낼 수 있는 여리고 싱그러운 맛이 가득했고, 직접 기른 채소들 특유의 부드러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겉면에 살짝 불향을 입혀 구워낸 요리사의 솜씨는 탁월했다. 소금과 통후추로만 심플하게 간을 낸 것도, 단단하고 무른 정도가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균일-even-한 채소의 익힘 정도도, 모두 훌륭했다!
평소대로라면 요거트보울을 주문했어야하지만. ‘아침 첫 끼니는 익히지 않은 채소’라는 루틴을 깨는 김에 시금치, 토마토, 치즈가 든 오믈렛을 함께 주문해보았다. 엄청난 비기가 숨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나야할 그 맛을 낸다. 작은 동네식당이지만, 호텔조식으로 나왔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솜씨. 이곳 요리사님, 내공이 만만치 않다.
뚝딱 접시를 비우고 앉아서, 오늘 아침 나를 채워준 채소들이 자라난 텃밭을 상상해본다. 오토바이, 자전거, 혹은 아무것도 차지 않은 사람들이 이따금 식당 앞을 지나간다. 햇살이 따스하게 어루만진 한적한 거리, 싱그러움이 가득한 풍요로운 텃밭, 뭐든 뚝딱-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한 그 맛으로 차려내는 작은 동네식당. 나중에 내가 늙어서 살아갈 집 앞엔 이런 풍경들이 자리 잡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상상해본다.
달콤함, 그 너머의 것
식당을 나와 걷다보니 발걸음이 절로 익숙한 거리로 향했다. 삼왕상을 지나, 미슐랭 국수집과 그 옆집들을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정해진 시간 없이 영업하는 바나나튀김 노점이 오늘 문을 열었다! 쪼르르 달려가 바나나튀김 한 봉지를 주문했다. 바나나튀김은 바나나나무가 가로수인 치앙마이에선 아주 흔한 간식인데, 레시피는 집집마다 다르다.
오늘의 바나나튀김엔, 간간이 깨가 섞인 밀가루반죽이 바삭하게 입혀져 있다.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고들 하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는 바나나를 튀겼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게다가 갓 튀겨내어 아직 따끈따끈하기까지! 내 마음에 쏙 들어온 포인트는, 생각보다 달지 않았다는 것. 튀김옷에 살짝 간이 되어있고, 바나나도 후숙하지 않은 것을 쓴 것 같다. 평소에 후숙하지 않은 푸른 끼가 도는 바나나를 더 좋아하는 내 입맛에 안성맞춤. 하지만, 밀가루알러지 때문에 아마도 다시 사먹지는 못하겠지. 스스로 정한 규칙들을 잠시 깨고 맛본 한낮의 바나나튀김엔, 달콤함 이상의 달콤함이 있었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마법
길에서 후다닥 바나나튀김 한 봉지를 해치운 뒤 도착한 초콜릿카페. 오늘은 ‘하우스 블렌드 넘버 투’를 마셔본다. 우유는 어제와 똑같은 오트밀크. 다른 대체우유들은 어떤 맛을 낼지가 궁금하지만, 당분간은 똑같은 귀리우유를 베이스로 해서 각기 다른 카카오빈으로 만들어진 핫초콜릿의 맛을 비교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어제 마셨던 ‘하우스 블렌드 넘버 원’의 맛이 벌써 기억에서 희미하다. 핫초콜릿과 함께 제공되는 작은 노트를 찬찬히 읽으며, 오늘의 핫초콜릿을 음미해본다.
다크초콜릿 80%. 치앙마이와 Nakorn Si에서 재배한 카카오빈의 배합. 로스팅한 정도는 미디움. 과즙과 말린 롱간, 대추야자, 꿀의 향. 언어란, 인간이 부릴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마법. 작은 종이에 적힌 향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면, 뭉툭하게 지나칠 뻔하던 맛과 향에서, 미각도 덩달아 하나하나 섬세하게 글에 적힌 것들을 읽어낸다.
어느새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초콜릿카페의 창가. 어제의 맛은 이미 잊었어도, 오늘은 충실해야할 오늘의 맛이 있다.
아유, 카운터는 고양이한테 맡기라니까!
초콜릿카페를 나서니 벌써 밤이다. 숙소 근처에 토기에 음식을 주는 식당이 있어 밤산책을 겸해 찾아갔다. 구글지도엔 현지인들이 남긴 평점 다섯 개뿐. 도착해보니 손님은 딱 한 명뿐이다. 식당입구엔, 아수라백작 같은 털을 가진 고양이가 카운터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은 채로 식빵을 굽고 있다. 낯선 사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도, 아수라고양이는 태평하게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이 녀석... 보라는 카운터는 안 보고 잠만 자는데요?’
근무태만의 현장을 검거하려고 조용히 핸드폰카메라를 들이밀었더니, 귀신처럼 다시 반짝 눈을 뜨는 고양이.
‘자기는 누가 잔다 그래? 아빠 안 자니까 채널 돌리지 마라.’
자리에 앉았더니 사진을 곁들인 영어메뉴판을 가져다준다. 현지인들만 오는 식당인 줄 알고 주문을 잘못하며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마침 구글맵 후기에서 본 토기사진이 있어 호기롭게 그 메뉴를 주문했다. 곧바로 투박한 토기에 담긴 숯불이 나오고, 뒤이어 뚝배기를 연상시키는, 그러나 좀 더 투박한 두꺼운 토기가 숯불 위에 턱 얹어졌다. 메뉴에 적힌 영어를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토기 안에 담겨 나온 음식은, 맑은 국물의 알탕이다.
금세 보글보글 끓어오른 뜨끈뜨끈한 알탕. 한국사람이 이 맛을 싫어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주로 고춧가루를 넣은 알탕을 많이 먹었는데, 내 입맛엔 맑고 칼칼하게 끓인 치앙마이 알탕이 훨씬 마음에 든다. 치앙마이의 음식들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이곳 풍경들처럼, 깔끔한 맛이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알탕 한 그릇의 양이 한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 팔팔 끓는 탕에 흰 쌀밥을 곁들이니, 선선한 치앙마이의 밤이 금세 따끈해졌다.
게 눈 감추듯 알탕 한 그릇을 해치우고 카운터로 갔더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수라고양이. 두 눈을 꼭 감고 단잠에 빠져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며시 눈을 뜬다.
‘어이, 가시게? 돈은 내고 가야지.’
주방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온 사장님에게 값을 지불하고, 맛있게 먹었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동안, 고양이는 당연한 제 일이라는 듯 늠름하게 카운터 가장자리를 지켰다.
‘집사양반 또 일하다 말고 뛰쳐나왔네... 카운터는 고양이한테 맡기라니까.’
검은고양이는 불길하다고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 사람 하나 없이 세탁기들만 여럿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는 코인세탁소에서 또다시 고양이를 마주쳤다. 고양이 목에 걸린, 세탁소 벽에 칠해진 것과 똑같은 파란색 목걸이가 ‘엣헴, 내가 여기 주인장이요!’하고 대신 말해준다.
세탁할 것도 아니면서, 살짜쿵 세탁소 안으로 들어서 본다. 역시나,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고양이. 훌쩍- 입구에 놓인 선반으로 뛰어올라 킁킁- 새로 온 손님의 냄새를 맡는다. 깊어가는 밤을 지어 입은 듯한 새까만 털, 그 속에 독야청청 보름달처럼 빛나는 노오란 눈동자. 고요한 밤이 되면, 고양이들의 눈은 더욱 환하게 빛을 낸다. 마치 그 속에 우주가 탄생하는 신비를 담고 있는 것처럼. 검은고양이들이 불길하다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인간은 절대 그 전부를 알 수 없을 무한한 우주가 버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손님맞이는 다 마쳤다는 듯, 태평하게 그루밍을 시작하는 까만 고양이. 오늘 하루 세탁소고양이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마주한 인간사의 풍경들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길 떠나는 고양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매일 걷는 길목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너 명의 사람들 모두 배낭을 멘 관광객들이다.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건, 밤을 닮은 새까만 고양이. 세탁소고양이와는 달리, 목에 목줄이 없다. 몸에는 무언가에 할퀸 듯, 커다란 상처가 나있다. 치료는 받았니. 밥은. 돌봐주는 사람은 있니. 오늘밤 따뜻하게 몸을 뉘일 집은. 걱정하는 사람들을 흘긋 쳐다보곤, 고양이는 총총총 어둠에 휩싸인 길을 걸어, 이윽고 까만 밤 속으로 사라졌다.
남국의 밤은 한국의 겨울처럼 살을 에는 것은 아니지만. 너에게도 부디 밤이 되면 돌아갈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편히 네 한 몸 뉘일, 그런 곳이.
고양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어느새 온몸에 스며든 서늘한 밤에, 문득 깨달았다. 사람에게든, 동물에게든, ‘돌아갈 곳’이란, 내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건, 종을 불문하고 가지고 태어나는 ‘생존의 감각’이리라.
나라를 떠난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탈국가’의 시대. 한창 건강하게 사회활동을 해야 할 사람들이 태어난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나라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내 나라 속에서 상처 입어도 치유 받을 수가 없는, ‘생존에의 위협’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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