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올드타운에서의 둘째 주
12월의 마지막 날
치앙마이에서의 두 번째 일주일이 끝나간다. 그간 치앙마이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알게 된 거라면, 나는 북적이는 큰길보다는 한적한 골목길을, 북적이는 유명카페나 식당보다는 ‘작은 집들’을 사랑한다는 것. 그런데,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그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고급호텔이 즐비한 잘 닦인 길을 걸어가는데, 러시아에서나 입을 법한 모피코트가 눈에 들어온다.
한여름의 햇살 속에 홀로 겨울을 두텁게 껴입은 마네킹은, 머리엔 구멍이 숭숭 뚫린 넓은 차양의 여름모자를 썼다. 상점주인은, 팔리기를 기대하며 모피를 길가에 내어둔 걸까. 아니면, 단지 ‘여기와는 다른 너머의 어딘가’를 꿈꾸며 상점 앞을 치장해둔 것뿐일까. 그도 아니면, 치앙마이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날아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추운나라의 가장 사치스러운 옷차림이,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게 하는 ‘부의 상징’인 것일까.
생각에 빠져있다 보면,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금세 목적지에 다다르곤 한다. 오늘 아침을 먹을 식당은 <Fern Forest Cafe> 식물원처럼 초록이 가득한 정원엔 벌써 손님들이 꽉 차서 앉을 자리가 없다. 반면 실내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 같지만, 크리스마스트리와 피아노가 놓인, 누군가의 응접실에 온 것 같은 풍경이 내 눈엔 소란한 바깥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오늘은 북적이는 곳에 가야지’ 결심했지만, 결국 택한 것은, 사람들과는 멀찍이 떨어진 한적한 식탁. ‘나만의 아침식사 루틴’을 따라, 오늘도 요거트보울과 샐러드를 주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접시 위엔 꽃 한 송이
용과, 파인애플, 파파야, 패션푸르츠. 요거트보울 속에 내가 좋아하는 열대과일들이 총집합했다. 오늘도 접시 위의 화룡점정은, 한 송이의 꽃. 오늘의 꽃은 검은 빛깔이 돌 정도로 진한 보라색이다. 치앙마이에는 일 년 내내 꽃이 지천에 피어나있으니, 그저 접시에도 한 송이 따다 올린다. 굳이 의도를 설명하지 않아도, 치앙마이의 작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걸으며 알록달록 색색으로 피어난 꽃들에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두어본 사람이라면, 그저 미소 짓게 되는 환대. 마음은 넘쳐도 꽃은 단 한 송이만 놓는 것이, 단 한 송이더라도 식당마다 다 다른 꽃을 놓는 것이, 탐욕스럽지도 빈곤하지도 않은, 각기 다른 개성 속에서도 결국엔 모두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치앙마이의 삶의 풍경들을 대신 전해준다.
샐러드 위에도 어김없이 놓은 보랏빛 꽃 한 송이. ‘버섯샐러드’라는 메뉴를 주문했는데, 이런, 튀김옷을 입은 버섯을 올린 샐러드다. 맛은 있지만, 밀가루는 알러지 때문에 특히 아침 첫 끼니에는 피해야 해서, 몇 개만 맛보고 나머지는 튀김옷을 벗겨내고 먹었다. 접시에 수북이 담은 신선한 푸른 야채에 올리브유와 발사믹식초, 간장으로 깔끔하게 맛을 낸 소스엔 튀기지 않은 버섯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다.
올해의 성탄절은 이미 떠나갔지만, 아직 크리스마스가 한창인 식당.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니, 모닥불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드디어 영업시간에 맞춰 ‘미슐랭 어묵국수집’에 왔다. 앉자마자 메뉴판을 가져다주시는 사장님의 얼굴엔 싱글벙글 미소가, 경쾌한 몸짓엔 밝은 에너지가 가득하다. <미슐랭가이드>가 식당을 평가하는 기준엔 ‘식당직원들의 친절함’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지만. 손님들까지 덩달아 밝아지게 하는 그 마음가짐이 국수를 만들 때에도 녹아들어, 바로 옆 국수집들을 제치고 매년 ‘미슐랭 빕 그루망’을 차지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태국에 오면 좋은 건, 국수집에서 면의 굵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 넓적한 라이스누들의 어묵국수를 주문했다. 치앙마이에 와서 두 번째로 먹어보는 어묵국수. ‘바다생선으로 만든 탱탱한 어묵’이 특기인 집답게, 작은 국수 한 그릇에 다양한 종류의 어묵들이 야무지게도 담겨 나온다. 어묵은 첨가물이나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듯 깔끔한 맛에, 탱탱한 식감에서도 신선함이 느껴져서,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 배가 불러버린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다음엔 아침을 일찍 먹고 와서 어묵도 한 접시 같이 주문해야지.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슐랭 옆집들>에 이어, <미슐랭 식당> 역시 내 마음 속에 단골집 등극!
고양이점원은 오늘도 열일 중
거리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구경을 하며, 하늘에 닿을 듯 자란 초록을 올려다보며, 걸음은 다음 단골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바나나나무는 주렁주렁 열린 열매를 한 아름 품에 안고 인간사를 관조하고, 알록달록 귀여운 폼폼목걸이를 한 고양이점원은 오늘도 부지런히 오늘의 일감들에 재봉질 중인 집사 곁을 지킨다.
‘어서 오세요! 집사는 오늘도 일하느라 바쁘니까 수선 맡기려면 저한테 접수하세요!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나한테 오늘은 ‘그저 오늘’인 걸요!’
성벽 너머로부터 날아든 엽서
12월의 마지막 날에도 어김없이 향한 나의 첫 치앙마이 단골카페. <KHOM chocolate house> 오늘은 태국 북서부의 TAK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카카오빈으로 만든, 함량 80%의 다크초콜릿을 주문했다. ‘Tak!’은 덴마크어로 ‘Thank you’라는 뜻인데. 잊고 있던 언어가 떠오르며, 12월 마지막 날의 따뜻한 초콜릿 한 잔이 내 마음속에 남몰래 작은 의미 하나를 품었다. 낯선 도시에 매일 가는 단골집이 생긴다는 건, 그 사회 속에 한 걸음 더 발을 들여놓는 것. 매일 가도 또 가고 싶은 단골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고마움을 담아서, 초콜릿 한 잔을 정성스레 비우고 이제 그만 떠나려는데, 내가 올 때마다 항상 카운터를 보고 있는 점원-혹은 사장님-이 조심스레 다가와 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직접 제작한 크리스마스엽서라는 설명과 함께 ‘요즘 매일 방문해줘서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수줍게 말을 걸어온 그녀의 이름은 ‘제인’.
그녀는 카페에 방문한 첫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내게 친절하게 주문하는 법이며, 카페에서 취급하는 카카오빈의 산지에 대한 내용들은 물론이고 카페 멤버십에 가입하는 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던 터라, 그 뒤로 카페를 방문할 때면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드느라 바쁜 그녀에게 차마 말을 걸지는 못해도 나 홀로 마음속에 친밀감을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었다. 항상 조용하고 차분한 제인에게도, 아직은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되어 더 반갑고, 고마웠다. 내가 벌써 2주째 치앙마이를 여행하는 중이며, 앞으로도 넉넉히 두 달은 더 치앙마이에 머물 예정이란 사실에, 제인은 적잖이 놀라고 또 반가워해주었다.
곧 빠이로 떠날 예정이라 당분간은 카페에 올 수 없지만, 치앙마이에 돌아오면 꼭 다시 들르겠노라고, 진심으로 약속한 12월의 마지막 날.
마흔을 넘기고 나서부터 인간관계란 한 해 또 한 해 내 둘레에 더 높게 담장을 쌓아가는 일 같지만. 해마다 더 높아져만 가는 그 성벽을 때때로 살랑이며 부드럽게 넘어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소한 다정함들은, 인간이 결국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마지막 날의 의미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전 세계가 다함께 축하하는 오늘 같은 날들엔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웬만해서 인기 있는 식당들은 가기가 어렵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는 특히 커플이나 가족단위의 외식손님들이 일 년 중 가장 많은 날 아닐까? 헌데 바로 그래서, 예약석들 사이에 애매하게 남아있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뜻밖의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찬란한 불빛이 수놓은, 다가올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끌벅적한 치앙마이 중심가를 부지런히 걸었다. 떠나오기 전 ‘치앙마이에 가면 뭘 먹을까’ 눈에 불을 켜고 지도를 살펴보니 높은 평점을 받은 프렌치식당들이 여러 군데 눈에 띄어서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프랑스음식을 먹으러가자’는 계획을 세워둔 참인데. 그 계획의 첫 개시를 하필 12월의 마지막 날 하게 될 줄이야! 예약을 하지 않아서, 과연 오늘 프랑스식당에 첫 발자국을 찍게 될지는 미지수.
미슐랭 별을 단 첫 번째 식당에선 당연하게도 ‘예약이 이미 다 찼다’며 퇴짜를 맞고, 곧 이어 두 번째로 도착한 중심가의 아늑해 보이는 식당. 문 앞에 세워진 팻말에 적힌 <Full House>를 보고 돌아서려는데, 때마침 직원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문 앞에서 메뉴판을 넘기며 서성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온 것 같아서 ‘혹시 한 명이 앉을 자리는 없냐’고 물었더니, 딱 한 자리가 있단다. 본격적인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 ‘여덟 시부터는 예약이 있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묻기에 곧바로 쾌재를 부르며 승낙을 했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주방 바로 앞의, 천장이 조금 낮은 구석자리. 메인 홀과 동 떨어져있었지만 홀로 조용히 한 해를 반추하며 식사를 즐기기엔 오히려 좋았다!
밤이 아늑하게 똬리를 튼 낮은 천장 아래, 촛불 하나 밝히니 나만의 올해 마지막 식탁 완성. 북적이는 날들은 으레 그렇듯, 오늘의 특선코스 중 전채는 훈제연어, 주요리는 오리가슴살스테이크를 선택하고 하우스레드와인을 한 잔 주문했다. 제일 먼저 식탁에 놓인 따끈따끈한 빵과 버터를 먹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잠시. 신선한 푸른 야채 위에 훈제연어를 넉넉히 올려 나온 접시에 금세 행복해진다. ‘프랑스요리’의 특색은 거의 없는 평이한 요리지만, 어쨌든 오늘 같은 날 더 헤매지 않고 자리에 앉아 홀로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음식의 맛도 한껏 돋구어준다. 훈제연어는 거슬리는 맛이나 잡내 없이 선도가 좋았고, 케이퍼와 파프리카를 넣은 그린올리브, 파슬리를 꽂아둔 방울토마토, 한 조각씩 놓아둔 레몬과 라임까지, 접시 위의 모든 것들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서, 접시를 다 비웠을 때는 다음의 주요리를 맞을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포도과육을 얹어서 낸 오리가슴살은 모양에서부터 어떤 맛이 날지 꽤 궁금하게 만들었다.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적당히 보존되어있었고, 포도의 단맛이 은은하게 도는 소스는 고기 자체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살짝 감칠맛을 더해주었다.
<흑백요리사>로 단숨에 2024년 최고의 유명인사가 된 안성재 셰프가 동파육과 함께 곁들여 나온 청경채를 먹어보며 ‘메인이 되는 고기는 어느 요리사나 심혈을 기울여 굽기 때문에 채소의 익힘 정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해서 ‘채소의 익힘 정도’가 그와 덩달아 올 한 해를 강타한 유행어가 되었는데, 이날의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주요리는 ‘오리가슴살’이었지만, 결국 그 접시를 행복하게 마무리해준 건, 겉은 살짝 그을리고 속은 너무 무르지도 딱딱하지도 않게 부드럽게 수분을 머금어 ‘이 작은 조각 하나도 허투루 굽지 않았음’이 전해지는 작은 채소조각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른 밤에 휩싸인 거리를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 대체 무엇이기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골목길의 작은 식당들이 아닌, 겨우 구석자리 한 자리 얻은 중심가의 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였을까. 오늘도 여느 때처럼 부지런히 재봉일을 하는 집사 옆을 지키던 고양이점원에겐,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을 텐데.
모두가 떠들썩하게 축하하기에 바쁜 밤, 홀로 거리를 거닐며 비워내기를 해본다. 이 밤이 떠나면 찾아올, 새로운 날을 맞이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마주치는 불상들이 어수선하게 들떠있던 마음에 수평선을 하나, 또 하나 띄운다. 인류의 역사 동안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찾아 헤매온 것, 그것은 어쩌면, 헤엄쳐 나아가도, 나아가도,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 먼 바다의 수평선과도 같은 것이리라.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 휘황찬란한 불빛도, 요란한 소음도, 밤의 빛깔도, 걸을수록 모든 것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하나씩 마음속에 수평선을 덧그리다 보면, 마침내 저 너른 바다의 경지에 닿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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