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 올드타운에서의 둘째 주
새해 첫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이유
자고 일어났더니 날이 바뀌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 누군가의 화분에 자라난 나뭇가지들은 아직 성탄절의 반짝반짝한 치장들을 벗지 않았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아직은 얼떨떨한 아침,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내 앞을 갑작스레 정수리에 정확히 5:5 가르마를 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2층 건물과 키가 족히 맞먹는 가로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양이는 유유자적 걸어가서 마치 어느 면을 타고 올라가야 좋을지 정찰이라도 하듯 나무를 한 바퀴 빙 돈다.
‘얘, 얼룩아, 너 설마, 나무 타려고!?’
‘당연하죠! 오늘은 아침부터 길에 사람이 많아요. 어찌된 일인지 나무에 올라가서 좀 봐야겠어요.’
날렵한 몸집의 얼룩이고양이는 그리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우둘투둘한 기둥에 발톱을 척척 찍어가며 손쉽게 나무 중간까지 올라간 고양이가 매복이라도 하듯 가만히 멈춰서 한참 저 위를 쳐다보기만 하기에 ‘더는 못 올라가나보다’ 생각하고 있던 찰나, 고양이는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우다다다 달려서 내 키보다 한참 높은 나무의 등성이에 척- 하고 안착했다. 방금 전 매미처럼 한참동안 나무 중간에 붙어서 저 위를 살폈던 건, 오르지 못할 것 같아서 머뭇거린 게 아니라 올라가 앉을 자리를 미리 유심히 봐뒀던 건가 보다.
늘 조용하던 올드타운이 오늘은 아침부터 생기 넘치는 발걸음들로 북적인다. 그 이유가 ‘인간들이 오늘 새로운 해의 첫 아침을 맞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더라도, 호기심 많은 고양이는 오늘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복작대는 인간세상을 내려다본다.
‘오늘이 새해 첫날이라고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저 아래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려다보는 게 훨씬 재미있어요!’
아무래도 다음 식사시간까지는 나무 위에서 보낼 생각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는 얼룩고양이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걷는데, 마주 오던 내 또래 여행객이 해맑은 얼굴로 ‘Happy New Year!’하고 인사를 건넨다. ‘Happy New Year!’ 똑같이 화답하고 걸어가는데, 이번엔 머리가 희끗한 부부가 ‘Happy New Year! 오늘 거리에 사람이 참 많아!’하며 좀 더 길게 말을 붙인다. ‘Happy New Year! 다들 새해를 축하하러 나왔나 봐, 나도 그래서 지금 여길 걷고 있거든.’ ‘맞아, 우리도 그래!’ 길 위에서 아주 잠깐 서로 옷깃을 스치며 웃고는, 부부와 난 다시 서로 가야할 길을 향해 멀어졌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낯선 사람들로부터 불쑥 건네받은 다정한 인사말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길 위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지라, 갑작스레 건네어진 작은 말들은 고요히 가라앉아있던 새해 첫 날의 마음속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켰다.
오늘은 새로운 해의 첫날. 불쑥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도, 다정하고 온전하게 되돌아오는 날.
인간이 왜 그리도 많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은 순간. 그것은 어쩌면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감각을 이따금 우리 가슴에 다시 새기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새해에도 어김없이, 접시 위엔 꽃 한 송이
목적지인 식당에 도착했더니, 테라스엔 벌써 발 디딜 틈이 없다. 12월의 치앙마이는 야외에서 식사를 즐기기에 딱 좋은 정도로 뜨겁지만, 내내 걸어 다니고 있는 나는 굳이 야외좌석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 만석에 대한 아무런 미련 없이 문 안으로 들어선다. 실내도 이미 만석이지만, 다행히 홀 한 가운데 제일 작은 탁자 하나가 비어있다. 어젯밤에 이어 얻은 ‘나 홀로 여행’의 작은 행운. 자리에 앉자마자 매일의 루틴대로 오늘의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꽃 한 송이 살포시 올려준 요거트보울. 올드타운의 둘째 주를 서서히 떠나보낼 즈음이 되니, 조금 신기해진다. 치앙마이사람들이 내어주는 접시는, 언제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 그건 어쩌면, 만물이 서로 조화로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정성들여 깎은 알록달록한 과일조각들과 바삭바삭하게 구운 그래놀라, 허브 한 줄기를 곁들인 벌집꿀까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들여다보듯, 그릇 속에 정갈히 놓인 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했다. 브런치메뉴를 주문하면 저렴한 가격에 추가할 수 있는 가든샐러드는 쌉쌀하고 달큰한 잎사귀들이 섞인 푸른 야채에 블랙올리브와 얇게 썬 적환무를 간단히 얹어서 통후추와 올리브오일, 발사믹으로 딱 필요최소한의 간만 했는데, 자연스러운 슴슴함에 빨간 딸기가 딱 적절하게 달콤한 맛을 얹어주어 좋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아침식사를 마친 후엔 오트밀크로 만든 타이Thai밀크티도 한 잔. 진하고 달콤한 태국식 밀크티는 태국에 와서 한 잔쯤 마시고 가지 않으면 서운한 음료인데, 대부분 시판용 믹스를 쓰기 때문인지 우유를 대체우유로 변경해 주문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러니, 마실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마셔둬야지!
고양이보호구역
오늘도 고양이들은 주인 대신 가게 앞을 지킨다. ‘대신’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집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영역이기에, 고양이들은 늠름하고 성실하게 가게 앞에 앉아서 오고 또 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런데, 인도 한복판을 한량처럼 서성이는 고등어고양이에게 긴 목줄이 달려있다. 고양이를 설마 묶어두고 키우는 건가 싶어 긴장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까만 줄의 한쪽 끝은 가게 문 옆 기둥에 단단히 묶여있고, 나머지 한쪽엔 고리가 달려있어 고양이 목에 달린 목걸이에 수시로 걸었다가 떼었다가 하는 모양이다. 집사는 문 안에서 고객을 응대하느라 바쁘고, 고양이는 볕 따스한 한낮을 맞아 목줄을 걸고 집사 없이 혼자 ‘셀프산책’을 하는 중. 줄 길이가 딱 상점 안에 있는 집사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고 고양이가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정도다. 가게 앞 도로에 큰 차들이 연신 지나다니는 것을 보니, 집사는 혹 사랑하는 고양이가 위험한 도로로 튀어나가 사고라도 당할까봐 걱정이 되어 목줄을 거나 보다.
딱 목줄이 허용하는 곳까지만 산책을 하는 것이 익숙한 듯 고양이는 차양 밑에 늘어진 시원한 그늘 속을 어슬렁대다가, 인도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연신 사람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도 전혀 개의치 않는 고양이. 사람들도 익숙하게 바닥에 늘어진 목줄을 성큼 건너뛰곤 계속 갈 길을 간다.
치앙마이엔, 인간이 닦아둔 길 어디에나 고양이들이 함께 살아간다. 천하태평하게. 따스한 여름의 햇살을 만끽하면서.
Everydog deserves a home!
‘모든 강아지들은 집이 있어야 마땅해요!’
뒤이어 마주친 ‘강아지입양홍보’ 벽화가 반갑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흔히 그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를 대변한다고 한다. 혹자는 ‘개, 고양이보다 사람이 우선이지! 사람부터 챙겨!’라고 말하지만, 인간이 만든 아스팔트 위에 덜렁 털옷 하나 입고 태어난 작은 생명들이 모두 아늑한 집을 갖고 인간과 더불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세상에선 인간 역시도 서로에게 선뜻 따뜻한 마음을 베풀며, ‘함께’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다짐을 하는 새해 첫날 맞닥뜨린 귀중한 문구 덕분에 올 한 해를, 또 앞으로의 인생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하는지 잠시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강아지는 당신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옥상에 올라가는 이유
곧이어 도착한 <Kalm Village> 입구엔, 달콤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동그란 털뭉치가 뚝 떨어져있다. 초콜릿이 섞인 캐러멜 같은 독특한 코트를 입은 고양이는 한낮의 햇살 아래 포근하게 몸을 웅크린 채, 연신 들이닥치는 새해 첫날의 손님들은 아랑곳 않고 단잠에 빠져있다. 새해 첫날에 맞닥뜨리기 좋은, 고양이가 있는 풍경.
새해 첫날, 고양이는 나무에 올라가고, 사람은 옥상에 올라간다. 이곳 <Kalm Village>는 도서관, 전시관, 카페, 식당 등이 있는 복합문화공간인데,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올드타운의 전경을 내다볼 수 있다. 올드타운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만큼 고층건물이 없고, 이곳 <Kalm Village>역시 옥상이 그리 높지 않아서, 가까이에 내려다보이는 지붕들이 고층건물 꼭대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다른 편안함을 주는 것이 매력이랄까.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에 종종 가까운 산에 올라가 뜨는 해를 보곤 했는데. 오늘은 이미 해가 뜬 뒤에 일어난지라 일출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1월 1일이니만큼 부러 옥상에 올라왔다.
‘정상’에 오르는 것을 흔히들 ‘정복욕’이라 말하지만. 어쩌면 고양이와 인간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이유는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살아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알고자 하는 마음. 한참을 땀 흘리며 비탈길을 올라 마침내 탁 트인 산의 정상에 서면, 그제야 지나온 길들이 모두 보이듯. 걸어도 걸어도 한 치 앞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큰 키로, 더 멀리 보고 싶어서.
그리하여,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번잡한 이 모든 것들 내려다보았을 때, 마침내 가라앉는 마음의 고요한 수평선을 찾기 위하여.
여기는 고양이 포토월입니다.
옥상에 마련된 널찍한 평상에 드러누워 한참동안 볕을 쬐었다. 하릴 없이 볕 속에 누워있으려니, 인간도 분명 식물처럼 하루에 일정시간은 광합성을 해야 하는 것이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섭리는 아닐까 싶다. 한 시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었더니, 해를 보기 힘든 도시생활에선 늘 간당간당 바닥을 치던 내 ‘태양열 배터리’가 꽉 차오른 느낌이 든다.
온몸을 볕으로 가득 물들인 채, 도서관에 가서 이번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였다. 책을 읽지 않아도, 도서관에 켜켜이 쌓여있는 사람들의 ‘알고자 하는 열의’는 긍정적인 기운이 되어 내게 새로운 바람들을 불어넣고, 도서관을 떠날 즈음엔 내 머릿속에 새로운 해를 위한 계획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옥상에서, 도서관에서, 두루두루 충전을 마친 뒤. 이번엔 맛있는 음식들로 위장을 든든히 충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런데, <Kalm Village> 입구 앞에 마련된 포토스팟에 고양이 한 마리가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묘하게 연둣빛이 섞인 노란색 눈동자에 정수리엔 마치 참빗으로 빗어낸 듯 정확한 5:5 가르마를 하고서, 귀부인처럼 뽀얀 코트와 너구리를 닮은 포송포송한 꼬리를 뽐내는 중인 고양이 앞엔 팬미팅이라도 열린 듯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었다. 자연스레, 나도 사람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익숙하다는 듯, 하얀 고양이는 자신을 향하는 수 개의 카메라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실컷 자태를 뽐냈다. 여기, ‘고양이포토월’이었구나!
사람들이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을 동안 얌전히 포토월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하던 고양이는 ‘팬서비스는 이쯤하면 됐다’ 싶었는지 훌쩍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유유히 길을 떠났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딱 저녁 먹을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가 집사가 차려주는 저녁사료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났는지, 벌써 저 멀리 멀어진 하얀 고양이의 꼬리가 살랑- 살랑- 봄바람처럼 흔들린다.
석양이 내려앉은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식당. 먹어보고 싶은 음식은 많은데,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있으니. 고민 끝에 가장 낯선 음식을 주문해보았다. 채 썬 양파와 함께 태국식으로 양념한 차가운 오리고기. 이런, 내 취향은 아닌지 고기는 조금 질기고, 양념은 조금 텁텁하게 느껴진다. 아차,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었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젯밤 홀로 거리를 거닐며 했던 ‘비워내기’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인지, 고기요리가 조금 버겁다. 오늘은 아무래도 채식을 했어야 좋은 날이었나 보다. 면요리를 하나 더 주문할 생각이었지만, 모자란 듯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떠나는 마음
저물어가는 하루의 풍경은 ‘새해 첫날’이라는 감흥에 더 붉게 물들고, 나는 출렁이는 마음속에 석양이 번진 풍경들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 담는다. 오늘은 2023년의 첫날이자, 올드타운의 저녁을 걷는 마지막 날. 그새 내 마음에 진하게 스며든 치앙마이 올드타운의 작은 골목들을 뒤로 하고, 내일은 산골마을 빠이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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