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두 번째 주의 기록
첫 단골식당
전날의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걸음이 절로 삼왕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분명 ‘내일은 기필코 미슐랭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결심했었는데, 왜인지 오늘의 난 어제 미슐랭 국수집이 일찍 문을 닫는 바람에 얼결에 방문했던 ‘미슐랭 옆집’에 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어제는 덮밥을 먹었으니, 오늘은 국물이 있는 쌀국수를 먹어보자. - 근데 이제 당연히 이 집의 간판메뉴인 간장에 푹 졸인 오리고기를 곁들여서요! –
잘 익힌 청경채를 곁들여주었던 어제의 덮밥과 달리 오늘의 국수엔 고기로 빚은 완자가 두어 개 올라가 있다. 식기 전에 따끈한 국물부터 한 입 맛보고, 면발이 퍼지기 전에 탱탱한 쌀국수도 한 젓가락 맛보고. 국물은 고기를 발라내고 남은 오리뼈를 삶아 육수를 낸 것 같은데, 오리고기 특유의 잡내나 느끼함 없이 깔끔한 맛이다. 아침엔 헤비한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담백함이 매력적. 하지만 간장양념에 달콤짭짤하게 푹 졸인 오리고기는 육수에 빠졌을 때보다 고슬고슬한 쌀밥에 얹었을 때 더 감칠맛이 살아나는 것 같다.
비록 내 취향엔 살짝 어긋나지만, 한국에서는 오리고기라면 주로 훈제나 로스구이, 아니면 약재와 함께 한 마리를 푹 고은 탕 정도만 먹어본지라, 맑은 국물의 오리국수는 충분히 한 번 먹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 안겨주는 즐거움에, 금세 국수를 한 그릇 뚝딱 비웠다. 궁금하던 메뉴를 먹어봤으니, 다음엔 다시 덮밥을 먹어야지. 또 올 결심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왕이면 새로운 집에 가봐야지!’가 식당을 선택하는 첫 번째 원칙이었는데.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 원칙은 나이가 들며 부화한 알의 껍질이 깨지듯 파스스 깨어지고, 그 속에서 새롭게 고개를 내민 요즈음의 난 아무래도 ‘갔던 집에 또 가기’에 푹 빠져버린 것 같다.
태국 국수집들의 한 그릇은 식사량이 많지 않은 사람도 혼자서 가볍게 먹기에 딱 좋은 양이다. 한국의 한 그릇을 기준으로 하면 2/3인분, 혹은 반인분 정도 되려나. 고로, 식사량이 결코 적지 않은 내 배는 아직 부르지 않으니, ‘미슐랭 어묵국수’로 2차를 해볼까 하며 호기롭게 발걸음을 옮겼는데, 이런, 벌써 영업마감 중이다. 어제 확인한 영업시간은 분명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였는데!? 2시를 좀 넘긴 시각인데 벌써 식당은 깨끗하게 정리된 채 내일의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
각기 저마다의 시계를 따라 느릿한 듯 부지런히 흘러가는 치앙마이의 여름. 미슐랭 어묵국수를 먹으려면 다음엔 좀 더 서둘러야겠구나. 치앙마이 세 달 살이 중 겨우 두 번째 주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다음’이 있을 것을 의심치 않으며, 다시 길을 떠났다.
첫 단골카페
‘어제 갔던 집에 오늘 또 가는 것’은, 그 집이 이미 내 마음속에서 끈끈한 단골집이 되었음을 의미하리라. ‘미슐랭 옆 국수집’에 이어, 어제 방문했던 <KHOM Chocolate House>로 또 발걸음이 향했다. 이곳은 태국에서 재배되는 카카오빈을 산지별로 맛볼 수 있는 초콜릿카페다. 초콜릿은 내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유일한 기호식품인지라 여행을 떠나기 전엔 으레 그 지역에 눈에 띠는 초콜릿상점이 있나 찾아보는데, 치앙마이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님에도 양질의 초콜릿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꽤 여럿 있었다.
개중에서도 <KHOM Chocolate House>는 여러모로 직접 방문해보기 전부터 ‘여긴 반드시 내 단골집이 될 거야!’라고 점찍었던 곳인데, 역시나, 어제 처음 방문하자마자 곧바로 내 마음에 ‘단골집’으로 들어앉아버렸다. 이곳의 시그니처메뉴는 초콜릿을 진하게 녹여 만든 음료인 ‘핫초콜릿’인데, 다양한 산지의 원두를 취급하는 커피전문점처럼, 산지별로 다양한 카카오빈을 구비해두고 몇 가지 종류를 블렌드하거나, 한 가지 빈만을 사용하거나, 카카오함량을 달리하여 진하게, 혹은 연하게 농도의 차이를 주는 등 다양한 풍미의 핫초콜릿을 제공하는 전문성이 매우 돋보인다.
그러다 보니 ‘핫초콜릿’만으로도 메뉴판이 이미 책 한 권인데, 카운터 옆 쇼케이스엔 생초콜릿과 초콜릿케이크 등 함께 즐길 수 있는 디저트도 야무지게 갖춰두었다. 뿐만 아니라, 흔히 시판되는 형태의 블록초콜릿과 카카오가루, 카카오차 등도 손쉽게 테이크아웃 할 수 있도록 세련되게 포장하여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으니. 초콜릿을 사랑한다면, 절대 한 번만 갈 수는 없는 곳이다.
어제는 첫 방문이었던 만큼 핫초콜릿 대표메뉴 여덟 가지 중 세 가지를 골라 마셔볼 수 있는 ‘핫초콜릿 샘플러’를 주문했었다. 여기서 내가 <KHOM Chocolate House>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 진한 프랑스식 핫초콜릿은 걸쭉한 농도를 내기 위해서 단단한 블록이나 태블릿 형태의 초콜릿을 생크림–혹은 우유-에 넣고 뭉근하게 끓이는 레시피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유제품에 알러지가 있는 내겐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오트밀크-oatmilk, 귀리로 만드는 식물성 우유’를 비롯해 ‘코코넛밀크’, ‘아몬드밀크’, ‘피스타치오밀크’까지, 무려 네 가지의 대체우유 옵션이 있었다!
유행 혹은 생활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오트밀크’ 시장이 제법 탄탄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한국카페에서 좀 더 대중적인 우유 대체 옵션은 ‘두유’나 ‘아몬드밀크’인 것 같다. 유제품은 물론이고 대두와 아몬드, 호두 같은 일부 견과류에까지 알러지가 있는 나는 ‘비건’이라는 말만 믿고 카페나 식당에 갔다가 두부, 밀가루, 두유, 아몬드가 점령한 메뉴판 속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나도 찾지 못하고 좌절하는 일이 부지기수. 때문에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카페를 갈 때면 ‘비건’인지 여부보다는 카페가 어떤 우유 대체 옵션을 취급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
다행히도 치앙마이의 카페들은 절반 이상이 ‘오트밀크’나 ‘라이스밀크-ricemilk, 쌀로 만든 식물성 우유’ 등 대두와 견과류 등으로부터도 완전히 안전한 대체 우유 옵션을 고루 취급하고 있었다.
‘오트밀크’가 한국에서 대중적인 식료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은 단연 요 몇 년 사이 한국을 강타한 ‘비건Vegan’이라는 시류 덕분일 것이다. 2016년에 해외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난 모든 종류의 고기와 유제품을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소, 닭, 돼지 외의 일부 육류와 요거트, 치즈 등 발효된 유제품은 먹는다- 어쩌다 그런 내 식성을 밝히게 되면 ‘젊은 사람이 아무거나 잘 먹어야 건강해지지’라거나, ‘그렇게 까다롭게 유난을 떨면 어떤 남자가 너를 데리고 사니?’, ‘너는 그럼 대체 뭐 먹고 살아?’ 같은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즈음부터 ‘뉴욕’에서 시작된 샐러드열풍을 시작으로 비건음식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하더니, 2024년 현재, ‘비건VEGAN’은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하여 이제 단순한 식생활만이 아닌 ‘힙hip한 생활방식’으로서 완전히 한국사회에 정착한 것 같다.
내가 처음 ‘Vegan’이라는 단어를 ‘일상용어’로서 접했던 건 스웨덴에서 갓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2008년이었는데, 당시엔 그 단어가 ‘주류와는 다른 도덕적 신념’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영위하는 식생활’ 등을 의미하는 경직된 경계선처럼 다가왔다면, 요즈음의 ‘비건’은 ‘건강한 것’과 ‘공존의 생활방식’은 물론이고 그야말로 ‘힙한 것’, ‘젊은 것’, ‘선구적인 것’ 등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포용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의 경우 현재 지역보다는 대도시에서 ‘비건생활’을 하기가 월등하게 용이한데, 이러한 시류는 오래 전부터 ‘채식의 도시’로 유명했던 치앙마이와는 정반대의 흐름을 띠고 있는 것 같다.
과거가 미래가 된 곳
곳곳에 오래된 불교사원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도시답게, 살생을 하지 않는 승려들과 함께 살아가는 치앙마이엔 전 세계적으로 ‘Vegan’의 바람이 불기 전부터 ‘비건푸드Veganfood’가 풍부했다. 고작 일주일 경험했을 뿐이지만, 치앙마이의 음식들은, ‘절대로 육식을 해선 안 돼’라고 엄격하게 강제하진 않지만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함께 부드럽게 채식을 권하는 태국불교의 모습을 닮은 것도 같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하다 보면 결국 닿게 되는 변하지 않는 어떤 본질의 영역처럼, 제철의 채소로 요리해낸 치앙마이의 음식들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따뜻한 햇살과 다정한 바람과 시원한 비를 맞으며, 그저 본능대로 자라나는 자연 본연의 맛이 아주 자연스레 담겨있다. 이들이 내는 맛은, 대도시에서 ‘비건푸드’의 유행을 타고 제조된 많은 식품들이 과도한 첨가물과 인공감미료의 사용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오히려 해치고 있는 안타까운 결과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영역에 있다.
더불어, 밀보다는 쌀을 주식으로 해온 태국의 식생활은 일찍부터 ‘비건’ 카테고리 내에서도 다양한 ‘글루텐프리’ 옵션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다양한 견과류들을 고루 재배하기 좋은 따뜻한 기후는 아몬드, 땅콩, 호두, 캐슈넛 등 견과류 카테고리 내에서도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해주었다. 이에 치앙마이는 한국보다 훨씬 앞서 ‘Vegan’의 개념을 확고히 한 서구권 여행객들에게 일찍부터 ‘성지’ 같은 여행지로 자리매김하였으니, 이 작은 도시에서 잘 보존해온 ‘과거의 생활양식’이 마침내 전 세계를 덮친 ‘미래의 생활양식’과 서로 만난 격이랄까.
켜켜이 쌓은, 시간의 빛깔과 향기
남미가 고향인 ‘카카오나무’는 북위 20도와 남위 20도 사이의 비가 꾸준히 내리는 열대기후에서 잘 자란다. 북위 18도에 자리 잡은, 일 년 내내 여름인 치앙마이 역시 카카오나무가 잘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 지난 한 주 동안 ‘걷는 여행’을 하다 보니, 과일을 파는 노점에 간혹 집 마당에서 갓 따온 듯한 노란색이나 주황색 카카오열매가 구석에 한두 개 덩그러니 놓여있는 풍경과 적잖이 마주쳤다.
재미있는 건, 더운 기후를 좋아하면서도 카카오나무는 뜨거운 햇살을 직접 받는 것은 싫어해 다른 나무들이 만든 그늘 밑을 선호한단다. 거인 같은 바나나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치앙마이는 카카오나무가 자라기엔 최적의 환경을 갖춘 셈.
몇 개월에 걸쳐 까다롭게 맺은 열매는, 그러나 속의 씨앗들은 아직 익지 않은 상태다. 이 열매를 반으로 가르고, 허여멀건한 씨앗들을 꺼내어 다시 여러 날 시간을 들여 발효시켜야 우리가 아는 특유의 향과 갈색빛깔을 머금은 ‘카카오빈’이 완성된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이 ‘카카오빈’을 정성스레 볶아, 껍질을 벗기고, 분쇄하여 압착하는 과정까지 거쳐야, 마침내 열매의 지방질만을 모은 카카오버터와 그 나머지인 카카오가루가 얻어진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오늘 내게로 온 핫초콜릿 한 잔. 어제 샘플러를 마셔보았으니, 오늘부터는 태국에서 생산되는 카카오빈으로 만드는 핫초콜릿 메뉴들을 하나씩 찬찬히 먹어보기로 했다. 오늘 주문한 것은 치앙마이와 촌부리의 카카오빈을 블렌드한 ‘Khom’s 하우스 블렌드 넘버 원’.
한낮의 햇살이 나긋나긋하게 하얀 커튼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함께 나온 카드를 읽으며, 한갓지게 음미해본다. 카카오빈이 내게 오기까지 거친 날들을. 따뜻한 햇살과 적당한 빗물과 온화한 바람과, 카카오나무보다 훨씬 큰 나무들이 기꺼이 가지를 잎사귀를 펼쳐 마련해준 선선한 그늘을.
다음 여행 계획
잔이 비어갈수록, 궁금해진다. 지금 내게 진하고도 쌉싸름한 향연을 선사하고 있는 카카오빈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의 풍경들이. <KHOM Chocolate House>에서 취급하는 태국산 카카오빈들은 치앙마이 외에도 Chonburi, Nakorn.si 등의 지역에서 생산되었단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켜고, 이르게 다음 여행을 기획해본다. 태국의 카카오산지들을 찾아가는, 나만의 여행. 내년이 될지, 후년이 될지, 아니면 그보다 더 먼 미래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잠깐 계획을 세워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그곳의 태양을 흠뻑 들이쉬었다.
늙어서 살고 싶은 곳
초콜릿카페가 문을 닫을 즈음에야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밤의 거리 곳곳엔 아직도 뜨겁게 낮을 달구었던 태양의 빛깔들이 남아있다. 밤을 향해 열린 누군가의 창문들. 멈춰 서서 잠시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낮에는 그냥 지나쳤을 일상의 풍경이, 밤의 주단을 씌우니 마치 마법의 상자처럼 신비롭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어제처럼 ‘미슐랭 옆옆집’에서 테이크아웃한 커리소스의 쌀국수 샐러드. 한국의 비빔국수가 떠오르는 음식이다. 잘 삶아낸 얇은 쌀국수는 구입한 지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커리소스를 끼얹어주었더니 면이 가닥가닥 탱탱하게 살아났다. 차가운 커리소스는 국수와도 푸른 잎사귀들과도 거리낌 없이 조화를 이루는 맛.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 ‘태국식 비빔국수’였다.
어제 내 마음에 들어왔던 ‘단골집들’에 차례로 다시 방문했던 하루. 깊어가는 밤, 작은 주방에서 홀로 차를 끓이며 무럭무럭 생각을 키워 본다. 늙어서 살고 싶은 곳에 대하여. 내가 늙어서 살아갈 곳에는, 매일매일 가도 또 가고 싶은 정겨운 집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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